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4일 오후 서울 한남동 조준웅 특검 사무실로 출석해 “글로벌 기업인 삼성이 범죄집단으로 몰리는 상황에 누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기자를 쳐다보며 “범죄집단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옮긴 여러분들이 문제가 있지 않으냐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차명계좌 출처 조사 형식적…‘개인돈’ 결론 낸듯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팀이 차명계좌에 있는 수조원대 돈이 계열사에서 조성된 비자금일 가능성에 대한 수사는 형식적으로 진행한 채 ‘개인 돈’이라는 삼성 쪽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김용철 변호사 등 관계자들이 이런 식의 수사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어, 특검의 수사가 끝난다고 해도 ‘부실수사’ ‘봐주기 수사’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검팀은 그동안 계좌추적 등으로 삼성증권에 개설된 차명계좌 1300여개를 찾아냈다. 하지만 특검팀은 여기에 들어 있는 자금의 출처와 관련해 김용철 변호사로부터 삼성 계열사의 비자금 조성 관련 진술을 확보하고도 압수수색 등 관련 수사를 하지 않은 채 계열사 관계자의 해명만 들은 것으로 6일 드러났다.
특검팀은 2002~03년께 이건희(66) 회장의 재산을 관리하는 박재중(2005년 사망) 그룹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 관재파트 상무가 삼성엔지니어링에 비자금 50억원을 조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진술을 김 변호사한테 받아냈다. 김 변호사는 “당시 김능수(53) 삼성엔지니어링 경영지원실장이 ‘매년 적자가 계속되는데 비자금을 만들라는 것은 부당하다’며 박 상무와 언쟁까지 벌였다”는 정황까지 진술했다.
특검팀은 또 삼성테크윈(옛 삼성항공)이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백화점 여성의류 영수증 등으로 거짓 비용 처리를 하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진술도 김 변호사한테 받아냈다. 김 변호사는 황백(55) 당시 삼성테크윈 전무(현 제일모직 부사장)가 분식회계를 통한 비자금 조성을 맡았다고 지목했다. 하지만 특검팀은 두 회사에 대한 압수수색도 하지 않고 황 부사장 등만 소환해 이들한테서 ‘비자금을 만들지 않았다’는 해명성 진술만 받았다.
특검팀은 공개적으로 제시된 ‘물증’도 외면했다. 김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구매대금을 부풀려 비자금을 만든다는 내용이 담긴 삼성전관(현 삼성에스디아이)과 삼성물산 국외지점 간의 1994년 합의서 관련 조사도 손을 놓다시피 했다. 김영희 경제개혁연대 부소장은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계약이 유지돼 비자금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이용철(48)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삼성 쪽에서 받은 ‘떡값’이라며 공개한 현금 500만원을 두른 띠지가 삼성물산 본사와 가까운 서울은행 분당지점으로 돼 있어 삼성물산에서 조성된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지만, 특검팀은 이 변호사를 소환하지도 않았다.
특검팀은 지난 4일 소환한 이 회장한테서 의혹을 받고 있는 돈이 모두 이병철 선대 회장한테 물려받은 개인 돈을 불린 것이라는 해명을 듣고 이를 수용하는 선에서 수사를 끝내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삼성화재 등 각 계열사 관계자들은 조성된 비자금을 담은 현금가방을 수시로 그룹 전략기획실로 날랐다고 증언하고 있다.
고제규 기자 unj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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