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엄마, 나 반장먹었어!

등록 2008-04-11 11:00

나의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 새학기가 되는 3월은 '선거철' 이었다. 반에서는 반장을 뽑기 위해 선거가 필요했으며 어린 학생들은 반장선거를 통해 비밀/무기명 투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1학기때 출마한 사람이 2학기때는 출마할 수 없다는 룰을 통해 '단임제'가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살던 서울의 가장자리 동네에서는 국민학교 반장선거 전후가 되면 골목 어귀에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앉아 자식 자랑을 하곤 했다."우리 철수가 이번에 또 반장이 되었지 뭐유~. " "우리 영희는 여러번 해서 이젠 하기 싫다는데도 선생님이 권해서...호호호" 그렇다. 교육에 열성인 엄마들 사이에서는 '공부로 몇 등' 이라는 기준도 중요했으나, 역시 '반장' 이라는 명칭이 풍기는 이미지, 즉 공부도 잘하고, 반 전체를 이끄는 리더,선생님의 애제자 라는 이미지가 주는 '감투의 가치' 가 더 중요했다.

반장선거가 끝나면 목소리가 커지는 동네의 철수 엄마,영희 엄마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올때는 노을을 등에 지고 축 처진 어깨로 대문을 여는 어머니를 보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그렇다. 난 반장을 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는 반장 1명, 남녀 부반장 각1명, 회장1명과 남녀부회장 각1명 총 6명의 임원을 뽑게 했는데 그것이 1,2학기 두번에 걸쳐 이루어 지므로 60여명중 12명이 '감투'를 한번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높은 당선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들내미가 꿰차고 돌아오는 것은 영양가 없는 '새마을 부장' 이니 '미화부장' 같은 완장이었으니 우리 어머니도 동네에서 체면이 안 섰을 것이다. (새마을 부장은 폐휴지 걷기, 미화부장은 청소 관리가 주임무였다)

난 어머니의 눈초리에 부담을 느꼈다. 반장선거에 나가려면 '소견발표'같은 것을 해야하는데 내가 원래 사람 많은데서는 수줍음을 잘 타서 땀만 뻘뻘 흘리기 일 수 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점점 은근히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아들자랑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고, "반장하면 공부할 시간을 많이 뺏긴대요~" 라는 변명도 이제 닳고 닳을만큼 써 먹은터라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난 답답했다. 무조건 '반장'이 최고인줄 아는 기성세대인 어머니가 후보단일화를 위해 출마를 양보한 나의 거국적인 결단을 알아줄리가 없었다. 그저 무조건 '반장이 되면 운동회때 팥빵을 돌리겠습니다!' '여러분을 차례로 대공원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이라는 사탕발림을 해서라도 감투하나 꿰차는 것을 바라는 '답답한 기성세대' 였던 것이다.

그때 내가 출마를 안 하는 바람에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한창 벌어지는 '자식 자랑' 대열에 끼지 못하고 맞장구만 쳐주며 집에 돌아올 때는 언제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시던 어머니...어머니...내 어머니...엄마가 보고플 땐~ 엄마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나니 눈물이 납니다...(지금도)


그런 어머니께 들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어머니가 반장 한번 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시던 이 못난 아들. 2008년 4월부로 '반장' 먹었습니다. 제가 사는 XX동 1번지 43통 13반 반상회에서 제가 사는 12세대가 모여사는 자그만한 맨션 대표로 '반장'이라는 감투를 쓰게되었습니다. 평균 연령이 68세라는 반장단 회의에서 30대 노총각의 '젊은 바람'을 불러 일으켜 보겠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 인지라 부담도 있습니다만, 제가 또 하버드 출신은 아니지만 국민학교때 '부장' 경험 다수에다가, 언론사 사장은 아니지만 언론에 자주 투고도 하고 있고, 마스크도 뭐 이정도면 동네 할머니들의 인기를 얻기는 충분하리라 봅니다. 반장 감투를 쓰는 순간 20여년전의 어머니 생각이 나고 뒤늦게나마 효도했다는 생각이 들어 왈칵 눈물을 쏟았습니다. 잘 해보렵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반장회장에서 동회장으로,동회장에서 더 높은 감투를 쓰게 될지? 이러다 대선 출마하게 될까 겁이 덜컥 나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어머니께 목 높여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엄마! 나 반장 먹었어 ! '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