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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간만에 본 아마추어 야구

등록 2008-04-14 18:02

지난 금요일 저녁에 우연히 대학 아마추어 야구를 잠시 관전하게 되었다. 한 대학 교정 안에 있는 구장에서 그 대학 야구 동아리 팀이 다른 대학 팀과 경기를 갖고 있었다. 야간조명시설에 불이 들어오고, 제법 진짜 시함처럼 보여 운치가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야구를 참 좋아했다. 초딩 때에는 단단한 찜뽕 공이나 테니스 공으로 아이들과 야구를 했다. 이런 공으로 하면 제법 정식 야구 분위기를 맛보면서도 글로브를 낄 필요가 없고, 포수도 포수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가 없어서 경제적이었다. 배트도 야구 방망이보다 훨씬 가는 대걸레 자루를 다듬어 썼다. 따라서 공을 치기가 의외로 쉽지 않아 삼진이 많았으며, 점수가 쏟아지는 경기가 별로 없었다. 아웃의 태반은 삼진이고, 출루의 태반은 볼넷이었다.

중딩이 되면서 진짜 야구공으로 글러브를 끼고 야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서 하거나, 한강변의 한국냉동(현 노량진 수산시장 자리) 주변의 황량한 넓은 공터에서 하였다. 성원이 부족할 때에는 한 팀에 7명씩 먹고 한 적도 있었다. 이때는 외야수는 좌중간과 우중간에 두 명이 서고, 내야수는 2루수와 유격수 역할을 한 사람이 맡되 2루 좌우 근처를 커버하고, 대신 1루수와 3루수가 베이스에서 좀 많이 떨어져 수비를 하였다.

가난한 시절이라, 나를 포함해 집안이 그다지 곤궁하지 않은 서너 명이 글러브를 서너 개씩 갖고 있었고, 나와 다른 한 아이가 포수 마스크를 한 개씩 갖고 있었다. 그래서 포수와 주심은 모두 마스크를 쓸 수 있었다. 글로브는 공수를 교체할 때 그 자리에 벗어두면, 수비에 나서는 팀이 그대로 받아 쓰면 해결되었다.

야구를 좋아하다 보니, 나는 중딩 1학년 때부터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들으며 정식 기록지에 기록을 하기 시작하였다. 기록지를 따로 사기가 쉽지 않아, 내가 직접 그려서 쓰곤 하였다. 각종 기록용 표기법은 야구 관련 책을 통해 자습하며 익혔다. 야구 기록을 시작하며, 나는 한 경기를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점에 너무나 놀랐고 흥분되어 더욱 더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내가 시합을 한 것을 거의 다 일지로 남겼다. 희한하게도 나는 내가 직접 뛴 경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이닝의 상황을 거의 다 기억할 수 있었다. 바둑의 복기 수준으로 기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각 이닝별 점수, 안타수, 에러, 사사구 등은 거의 틀림없이 기억하였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그것을 기록하고, 밑에다가는 나의 타격/수비 성적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나의 타격 기록은 볼카운트까지 다 기억하였으며, 내가 투수를 한 경우에는 내가 상대한 타자들 하나 하나의 상황을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여 기록하였다.

나는 타격에서는 주로 1번이나 3번을, 수비에서는 주로 투수, 1루수, 2루수, 중견수를 맡곤 하였다. 중딩 때에는 주로 투수를 하였는데, 고딩 때에는 어깨가 다소 약하여 2루수나 1루수를 주로 보았다. 스타일은 본래 우투우타였는데, 중딩 2학년 때부터 왼쪽에서도 치기 시작하여, 중3부터는 좌타를 70%, 우타를 30% 정도로 하였다. 소위 요즘 말하는 스윗치 히터였다.

나의 중딩 3년 전체 타율은 3할 8푼 정도였고, 홈런은 세 개였다. 동네 야구에서는 외야 펜스가 없으므로 홈런이라는 게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중딩 운동장 외야쪽으로 담장이 멀리 있는데, 그 담장을 넘기면 홈런으로 간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한국냉동 공터에서 할 때에도 외야쪽 멀리 빈 가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지붕을 완전히 넘기면 홈런으로 간주하였다. 실제 거리를 지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60~70m 는 충분히 나온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위를 넘기려면 적어도 비구 거리가 80m 는 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도 흐믓한 점은 나는 좌타에서도 우타에서도 홈런을 다 기록했다는 거다. ^^

나는 영등포중학교를 다녔는데, 중 2 초여름 어느 토요일... 약속대로 신림중학교에 가서 그 학교 애들하고 학교 대항 시합을 벌였다. 일주일 후 우리학교에서도 한 번 또 붙었는데, 나는 특히 원정가서 붙었던 첫 경기가 아직도 흐믓하고 인상 깊다. 7회까지 했는데, 우리가 2-0 으로 이겼고, 내가 6회까지 완투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네 야구지만, 그래도 평소에 잘 하는 넘들로 구성된 학교 대표팀이다 보니, 점수가 잘 나지 않았다. 내가 뛴 경기 중에서 점수가 가장 적게 난 경기였다. 2회초와 5회초에 한 점씩 뽑은 우리가 신승한 경기였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야구부가 없었으므로, 동네 야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동네" 수준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던 거다.

결혼 후에는 아내와 꼬맹이를 데리고 잠실 야구장에 가곤 하였다. 아이가 어려 처음부터 돈 내고 들어간 적은 거의 없고, 대개는 중계를 듣다가 6회쯤 되면 아내와 꼬맹이를 빨간색 프라이드에 태우고 잠실로 향한다. 7회말이 끝나면 경비원이 철수하면서 경기장을 완전 개방하기 때문이다. 무료로 8, 9회를 보는 시간은 꼬맹이가 지루해 하지 않고 신기해 하면서 두리번거릴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었다. 한 번은 연장전에 들어갔는데, 꼬맹이는 내 품에서 잠들고, 나와 아내는 승부를 만끽하였다.

보스톤과 시애틀에 살면서는 정식 야구를 한 번도 못해보고, 대신 소프트볼을 많이 하였다. 교회 대항 시합에서는 늘 교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렇지만 야구만큼은 못하였다. 박진감이 떨어지고, 긴장도도 떨어졌다.

이제 다시 서울에 들어와 정말 우연히 보게 된 대학 동아리 야구시합... 그것도 야간 경기...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며 내 입가에 웃음을 남긴다. 이제는 나이도 40대 후반이니, 정식 야구는 할 기회도, 또 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그래서인지 더욱 애틋하게 그 경기를 약 6이닝 관전하였다.

그런데 좀 실망(?)이었다. 6이닝동안 외야로 직접 뻗는 호쾌한 타구를 단 하나도 보질 못했다. 투수들의 공을 보니 정식 커브는 없고, 다 직구였는데도 말이다. 간혹 자연적으로 먹게 되는 슬라이더성 공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걸 의도하여 던진 것 같지는 않았다. 구속이 매우 빠른 편도 아닌데 말이다. 양쪽 투수 모두 스트라잌을 잡는데 급급한, 말 그대로 동네 야구 수준이었다.

수비 에러도 너무 많았고, 볼넷도 좀 많은 편이었다. 2회말부터 5회초까지 보았는데, 5회초까지 점수가 무려 10-6 이었다. 그 태반은 다 송구 에러에 의한 점수였다. 멋진 유니폼에 장비까지 번듯하게 갖추고, 야간 조명까지 받으며 치르는 대학 동아리 야구치고는 좀 실망이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에 묻혀있던 오랜 추억을 다시 끄집어 내어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경기였다. 내 인생의 기억에 "야구"라는 파일로 저장될 것들도 참 많을 것 같다.

사족 퀴즈: 한 팀이 한 이닝에 점수를 내지 못하면서 최대로 기록할 수 있는 안타 수가 몇 개일까요? 가끔 "아니 안타를 세 개나 치고도 한 점도 못 내냐..."는 말은 들은 적이 있죠? 그럼, 한 이닝에서 점수를 못 내고도 기록할 수 있는 최대 안타수는 과연 몇 개일까요? 답을 말하고 설명까지 해야 하는 고난도 문제입니다. 중딩 때 제가 기록을 하다가 직접 만든 문제입니다. ^^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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