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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탈퇴의 정치학과 수도권의 우경화

등록 2008-04-15 15:33

거대한 아파트의 왕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서울의 강북. 4월9일 총선을 알리는 벽보에 ‘층수제한을 풀어내고 뉴타운 지정을 늘리겠다’는 한나라당 후보의 공약이 눈을 사로잡는다. 통합민주당은 강북에서는 유일하게 이 지역에서 당선자(강북구을 최규식)을 냈다.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거대한 아파트의 왕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서울의 강북. 4월9일 총선을 알리는 벽보에 ‘층수제한을 풀어내고 뉴타운 지정을 늘리겠다’는 한나라당 후보의 공약이 눈을 사로잡는다. 통합민주당은 강북에서는 유일하게 이 지역에서 당선자(강북구을 최규식)을 냈다.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5년 전 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탈퇴의 정치학”이란 용어를 사용해 미국 유권자의 의식변화 흐름을 설명했다.

8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주류 집단들은 중산층과 노동계급에 대한 의존도를 대폭 약화시킬 수 있었다. 급속한 세계화의 여파로 기업의 국적이 무의미해지고 전 세계를 무대로 수익을 창출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등장했다. 공장 대량생산 체제가 사양기에 접어들었고 마이크로소프트사나 금융자본과 같이 고부가가치 산업이 대체산업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의사결정에 있어서 자국 단순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산업의 재편은 직업구조 또한 바꾸었다. 제조업 종사자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부자들의 소비에 의존하는 대인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의 비율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라이시는 토크빌이 주장했던 미국의 전통적 강점인 ‘이기주의에 기초한 애국심’이 더 이상 미국사회를 지탱해 주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과거 미국시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을 준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정부가 기업을 지원하거나 국제거래에서 자국기업을 보호한다거나 조세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곧바로 자신의 이익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정부가 기업을 지원하면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돌아왔고, 해외 무역에서 보호주의를 택해도 자국 기업의 이윤율이 증가하여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삶도 향상되었다. 조세를 통한 사회적 약자의 지원은 기업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복리후생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다국적기업과 고부가가치기업의 등장은 우선 기업의 국적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기업의 성장이 국민의 성장이라는 등식을 무너뜨렸다. 노동과 자본의 세계적 이동이야말로 기업으로서는 자국 국민의 저축, 자국국민의 소비에 대한 의존도를 급격히 낮출 수 있게 된다. 산업구조의 변화는 곧바로 고용구조의 변화로 이어진다. 단순 생산직 노동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대인서비스직 종사자들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저소득층이 고소득층의 소비에 의존하게 된다.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안전망의 확충은 더 이상 고소득층의 이익으로 연결되지 않게 되었다. 서서히 미국사회의 주류 계층은 이른바 “탈퇴의 정치학”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적어도 과거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근로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 줄 수 있다는 이기심에 근거한 납세의무의 이행과 같은 애국적 행동은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 지출돼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늘어난 단순서비스직 종사자는 고소득층의 소비가 활성화되어야 수익을 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전통적 공장제 기업의 수익구조와 다른 것이다. 전통적 공장제 기업은 노동자들이 생산을 해야 수익이 창출된다. 이에 비해 대인서비스직 종사자는 돈을 많이 번 고소득자들이 소비를 많이 해야 수익이 창출된다. 고소득자는 점점 독립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저소득층의 수익창출은 점점 더 의존적으로 되었다.

고소득층이 애국심을 버리는 현상을 라이시는 “탈퇴의 정치학”으로 표현했다. 아무리 수익창출이 세계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국적은 필요하다. 그래서 고소득층은 납세의무를 이행하지만 납세의무의 이행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국적국가에 대한 법적의무를 이행하는 차원에 불과하다.

더구나 사회의 신흥 중산층으로 부상한 대인서비스직 종사자들은 그들에 의존적이다. 대인서비스직 종사자들이 높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넓은 인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들은 종교단체를 비롯한 각종 단체에 가입해 안면을 넓히고 잠재적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업의 필요에 따라 그들은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

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받기 위해 법인본사를 외국으로 옮기겠다는 협박은 미국사회에서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미국의 부자들은 이런 식으로 의원들을 협박하여 지속적으로 법인세율을 낮추고 소득세율을 낮춘다. 국가가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국가에서 탈퇴하겠다는 것이다. 대인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중산층과 서민은 이들의 협박에 더 쉽게 굴복한다. 고소득층이 자국에서 소비를 해줘야 이들은 수익을 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고소득층의 세금을 줄이겠다는 정당에 투표한다.

물론 줄어든 고소득층의 세금이 투자나 소비로 귀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또한 미국사회의 관용의 상징으로 불리는 부자들의 기부문화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들의 이해에 직접 관계된 단체에 대한 기부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소득층은 탈퇴의 정치학으로 얻은 현금을 자신들끼리 몰려 사는 지역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그 기부금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올렸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만 이익이 돌아오게 만들었다.

국가의 협동체제의 붕괴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5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부자들의 탈퇴의 정치학과 중산층 서민의 우경화는 우리사회에서도 서서히 그 맹아가 나타나고 있다.

18대 총선 결과는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수도권지역 민심의 우경화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2%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종부세 완화를 당론으로 한 한나라당에게 수많은 수도권 유권자가 찬성표를 던졌다. 뉴타운으로 고향에서 쫒겨나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서울과 수도권의 전통적 빈민층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졌다. 부자들에게만 이득이 돌아갈 것이 분명한 감세정책을 당론으로 내건 한나라당에 수많은 중산층과 서민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서울은 이제 공장이 없다. 서울은 부자들과 부자들에 의존하는 대인서비스직 종사자로 넘쳐난다. 동작구에 거주하는 영세 자영업자는 서초구와 강남구에 점포를 두고 강남주민의 소비에 의존해 살아간다. 이들은 부자들이 자신의 자식교육을 위해 돈을 쓴다고 믿고 있으며 부자들이 소비를 많이 해야 떡고물이라도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남에 사는 부자들과 생활하며 이들은 강남 부자들이 졸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그들이 졸부가 된 것처럼 자신들도 졸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서울 전 지역이 이명박 시장 재임시절 뉴타운사업으로 앉은 자리에서 수억의 부동산 시세차익을 얻었다. 개발만 된다면 자신들도 졸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수도권 유권자의 표심을 천민자본주의적 행태로 규정한다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 유권자들이 수도권 유권자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유혹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원래 자본주의는 천한 부루죠아들이 개척한 사회이다.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원래 천한 것이고 노동자는 그들보다 더 천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부루죠아와 노동자는 원래 천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천하게 행동한다고 주장하면 맞는 말이지만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 나는 천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떻게 보면 수도권 유권자들의 드러난 투표 행태는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지금까지 제시한 자료들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다. 고작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비난일 뿐이다.

라이시는 이러한 시대흐름은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국가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공동체로 기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기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이기주의는 국가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오기 때문에 막아야 하는 것이다.

부자들은 국가를 위해 더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국가는 부자들의 희생으로 마련된 재원으로 부자들이 외국에서 노동과 자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국에서 노동과 자본을 찾도록 사회적투자와 사람에 대한 투자를 확대한다. 이러한 사회투자는 단기간에 효과가 나타날 수 없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일관되게 밀고나갈 정치적 리더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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