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철관 속에 누워 계시다니….”
6·10 만세 권오설 선생…일제, 고문 감추려 ‘납땜질’
사회주의계 항일 탓 후손은 학교도 제대로 못다녀
보상 못받는 양아들 권대용씨 “가난해 이제야” 탄식 흙더미 속에서 철관이 드러나자, 권대용(64)씨는 눈을 감아버렸다. 입에서는 탄식이 새 나왔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철관 속에 누워 계시다니….” 6·10 만세 운동의 주역인 그의 아버지 권오설(1899~1930년) 선생은 14일 오전 78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선생을 옥죄던 철제관은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만큼 녹이 슬어 있었다. 일제가 납땜질까지 해둔 관 뚜껑은 삭아서 흙을 걷어내자 푹석 내려앉았다. 선생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권씨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의 철제 관을 들어낸 뒤, 유해를 손수 다시 뉘였다. 곁에는 다른 묘지에서 이장해 온 어머니의 유해를 뉘였다. “12살 때 벌초를 하러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지요. 꿈 속에서 머리가 없는 아버지의 유해를 봤습니다. 너무 생생해서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형편이 되면 꼭 제 손으로 편안하게 다시 모시고 싶었습니다.” 이날 철관 속에서 나온 선생의 유해는 두개골과 얼굴 뼈가 심하게 손상돼 있었다. 선생은 6·10 만세운동을 벌인 지 두 달 만인 1926년 6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됐다.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일제 순사들이 6개월 동안이나 묘소를 감시하는 바람에 끝내 가족들조차 선생의 유해를 확인하지 못했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일제가 주검을 철로 만든 관에 모시고 땜질까지 해놓은 것은 선생의 주검이 공개되는 걸 막기 위한 걸로 보인다”며 “주검을 통해 심한 고문 사실이 알려지면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될까봐 우려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는 사회주의 독립지사를 아버지로 둔 ‘죄’로 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하고, 한평생 가난을 ‘업’으로 짊어지고 살았다.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고, 철이 들면서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서 어머니를 모셨다. 해방 이후 독립투사의 자손들은 나라에서 도움은 못 받아도 주변으로부터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권씨는 여느 독립운동가의 자손들과 달리, 아버지의 목숨과 바꾼 독립운동사를 자랑스럽게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80년대 중반 고향인 안동을 떠나 대구로 이사해 문방구를 경영하다 접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2남2녀를 키웠다. 2005년 3·1절에 권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54명을 포상할 때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하지만 대용씨는 양아들이라 ‘법적 근거’가 없어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혼자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속에 응어리가 맺히고 또 맺혔지만, 늘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긴 덕분”이라며 “부모님이 늦게나마 편안하게 잠드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쪽은 철제관을 보존 처리해 전시할 예정이다. 안동/글·사진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사회주의계 항일 탓 후손은 학교도 제대로 못다녀
보상 못받는 양아들 권대용씨 “가난해 이제야” 탄식 흙더미 속에서 철관이 드러나자, 권대용(64)씨는 눈을 감아버렸다. 입에서는 탄식이 새 나왔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철관 속에 누워 계시다니….” 6·10 만세 운동의 주역인 그의 아버지 권오설(1899~1930년) 선생은 14일 오전 78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선생을 옥죄던 철제관은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만큼 녹이 슬어 있었다. 일제가 납땜질까지 해둔 관 뚜껑은 삭아서 흙을 걷어내자 푹석 내려앉았다. 선생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권씨는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의 철제 관을 들어낸 뒤, 유해를 손수 다시 뉘였다. 곁에는 다른 묘지에서 이장해 온 어머니의 유해를 뉘였다. “12살 때 벌초를 하러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지요. 꿈 속에서 머리가 없는 아버지의 유해를 봤습니다. 너무 생생해서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형편이 되면 꼭 제 손으로 편안하게 다시 모시고 싶었습니다.” 이날 철관 속에서 나온 선생의 유해는 두개골과 얼굴 뼈가 심하게 손상돼 있었다. 선생은 6·10 만세운동을 벌인 지 두 달 만인 1926년 6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됐다.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일제 순사들이 6개월 동안이나 묘소를 감시하는 바람에 끝내 가족들조차 선생의 유해를 확인하지 못했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일제가 주검을 철로 만든 관에 모시고 땜질까지 해놓은 것은 선생의 주검이 공개되는 걸 막기 위한 걸로 보인다”며 “주검을 통해 심한 고문 사실이 알려지면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될까봐 우려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는 사회주의 독립지사를 아버지로 둔 ‘죄’로 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하고, 한평생 가난을 ‘업’으로 짊어지고 살았다.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고, 철이 들면서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서 어머니를 모셨다. 해방 이후 독립투사의 자손들은 나라에서 도움은 못 받아도 주변으로부터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권씨는 여느 독립운동가의 자손들과 달리, 아버지의 목숨과 바꾼 독립운동사를 자랑스럽게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80년대 중반 고향인 안동을 떠나 대구로 이사해 문방구를 경영하다 접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2남2녀를 키웠다. 2005년 3·1절에 권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54명을 포상할 때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하지만 대용씨는 양아들이라 ‘법적 근거’가 없어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혼자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속에 응어리가 맺히고 또 맺혔지만, 늘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긴 덕분”이라며 “부모님이 늦게나마 편안하게 잠드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쪽은 철제관을 보존 처리해 전시할 예정이다. 안동/글·사진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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