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꺾은 고사리를 삶아 널었다. 고사리를 몰캉하도록 삶아야 한다던 친정어머니 말씀을 새기며 적당하게 무를 때가 언제인지 가늠하느라 가스렌지 앞을 지켰다. 채반에 고사리를 건져 햇살 앞에 내 놓았다. 줄기는 자줏빛을 띠고, 잎사귀 부분은 녹색을 띤 고사리를 뒤적거리며 맛이 어떨까를 생각한다.
첫물은 비록 통통하지도 않고, 가늘지만 대신 영양분이 많다고 했다. 고사리 농사 지어 첫물 꺾은 것이라 귀하게 여겨진다. 누구에게 먼저 보내줄까. 선물할 곳을 챙기다 혼자 선웃음 지었다. 고사리가 돈으로 보여야 힘든 줄 모른다는데 고사리가 돈으로 보이기는커녕 지인들에게 나누어줄 선물로 생각되니 아무래도 난 돈하고는 거리가 먼 팔잔가 보다.
고사리를 다 널어놓고 부지런히 시댁 옆에 있는 밭으로 향했다. 어제 꺾다가 반 동강 하고 온 곳을 다시 뒤졌다. 어린 고사리 솟는 것이 참 신기하다. 비록 엎드려 꺾는 일이 수월할 수 없다. 금세 허리가 뻐근해지고, 뒷다리가 댕긴다. 고사리 농사는 싫다고, 고사리 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꺾는 일, 삶아 말려서 갈무리 하는 일 등, 뒷감당이 더 어려운데 그 일을 누가 다 할 거냐고 핏대 올리며 반대했을 때 그는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내가 다 한다.’며 큰소리 쳤었다. 막상 고사리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자잘한 뒷설거지는 온통 내 몫이다. 은근히 부아가 치솟았다.
고사리를 꺾어 집에 오니 집 앞 고사리 논에 있던 그가 사라지고 없다. 은근히 심통이 나기 시작하는데. 전화를 했다. '가는 길이다.'라는 것이다. '어딜!'이라고 물을 것도 없다. 아랫집 감산 아저씨가 맹장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흘 만에 퇴원하는 날이다. 아저씨 모시러 간다는 뜻이 아닌가.
“버스 타고 오면 되지 바빠 죽겠는데 당신이 꼭 모시러 가야 해요? 입원시켜 드렸고, 병문안 다녀왔으면 됐지. 바쁘다는 말 내게 하지 마. 마누라 생각 그 만큼 해 주면 업고 다니겠네.” 사람은 누구나 다 이기적이다.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 동물인지 모른다. 일꾼 대서 고사리 밭 매는 날 아저씨가 아프다기에 읍내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가 큰 병원에 가라는 바람에 진주까지 모시고 가서 입원을 시켰었다. 수술은 간단하게 잘 됐고, 지척에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 퇴원해서 시간 차 타고와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막상 성질 버럭 내고 전화를 끊었지만 금세 후회된다. 이웃사촌이란 게 뭔가. 여태 잘 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그 한 번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에게 성질 난 것을 괜히 남의 탓으로 돌렸으니 백번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다. 그가 인상을 확 구기고 들어왔다. 내가 성질내는 바람에 가속페달을 열심히 밟았다는 것을 안 봐도 알 것 같다. ‘성질내서 미안해’하면서 진짜 미안한 척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봤다. 내 하는 꼴이 우스웠는지 밴댕이 소가지를 푼다. “사람이 무안하게 말이야. 옆에 형수님이 타고 있는데.” “다 들었구나. 난 당신이 가고 있는 중이라고해서 병원에 가는 줄 알았더니 집에 오는 길이었어? 클 났네.” 일단 그의 기분은 풀어줬으니 아랫집 형님 기분도 풀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시간을 조금 벌기로 했다. 왜냐면 성질났을 때 금세는 우리 머릿속이 초당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남의 입장보다 내 입장만 생각하고 괘심하게 여긴다. 이웃 좋다는 게 뭔가. 아픈 사람 병원에 데리고 오고, 가는 것 당연히 해 줄 만도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섭섭하던 마음도 풀리고, 바쁜데 오라 가라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슬쩍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게 되면 오해도 없고, 얼굴 구길 일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손님이 오는 바람에 시간을 늦출 수 있었다. 오후에 형님께 전화해서 오해될만한 소지를 풀었다. “입원을 시켰으면 퇴원도 시켜주는 게 당연하지. 성질은 왜 내.” 웃으며 하는 형님의 한 마디에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사실 도인 같은 아저씨랑 형님이 그만한 일로 꽁할 것도 없지만 괜히 심통 낸 내 마음만 몹시 불편했던 몇 시간이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버스 타고 오면 되지 바빠 죽겠는데 당신이 꼭 모시러 가야 해요? 입원시켜 드렸고, 병문안 다녀왔으면 됐지. 바쁘다는 말 내게 하지 마. 마누라 생각 그 만큼 해 주면 업고 다니겠네.” 사람은 누구나 다 이기적이다.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 동물인지 모른다. 일꾼 대서 고사리 밭 매는 날 아저씨가 아프다기에 읍내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가 큰 병원에 가라는 바람에 진주까지 모시고 가서 입원을 시켰었다. 수술은 간단하게 잘 됐고, 지척에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 퇴원해서 시간 차 타고와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막상 성질 버럭 내고 전화를 끊었지만 금세 후회된다. 이웃사촌이란 게 뭔가. 여태 잘 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그 한 번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에게 성질 난 것을 괜히 남의 탓으로 돌렸으니 백번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다. 그가 인상을 확 구기고 들어왔다. 내가 성질내는 바람에 가속페달을 열심히 밟았다는 것을 안 봐도 알 것 같다. ‘성질내서 미안해’하면서 진짜 미안한 척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봤다. 내 하는 꼴이 우스웠는지 밴댕이 소가지를 푼다. “사람이 무안하게 말이야. 옆에 형수님이 타고 있는데.” “다 들었구나. 난 당신이 가고 있는 중이라고해서 병원에 가는 줄 알았더니 집에 오는 길이었어? 클 났네.” 일단 그의 기분은 풀어줬으니 아랫집 형님 기분도 풀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시간을 조금 벌기로 했다. 왜냐면 성질났을 때 금세는 우리 머릿속이 초당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남의 입장보다 내 입장만 생각하고 괘심하게 여긴다. 이웃 좋다는 게 뭔가. 아픈 사람 병원에 데리고 오고, 가는 것 당연히 해 줄 만도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섭섭하던 마음도 풀리고, 바쁜데 오라 가라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슬쩍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게 되면 오해도 없고, 얼굴 구길 일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손님이 오는 바람에 시간을 늦출 수 있었다. 오후에 형님께 전화해서 오해될만한 소지를 풀었다. “입원을 시켰으면 퇴원도 시켜주는 게 당연하지. 성질은 왜 내.” 웃으며 하는 형님의 한 마디에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사실 도인 같은 아저씨랑 형님이 그만한 일로 꽁할 것도 없지만 괜히 심통 낸 내 마음만 몹시 불편했던 몇 시간이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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