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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노모 (老母)

등록 2008-04-18 15:50

노모께서 파마머리에 화장을 곱게 하시고 미색 한복을 갖춰 입으시고 체경에 모습을 지처보면서도 자꾸만 겸연쩍어 하신다. 입성때문이 아니다. 공적이라는 것이 당신 보시기에 내세울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신 까닭이다. “나는 안가고 잡다. 무슨 영화를 볼일이 있다고 가것냐”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도 나는 별 할 말이 없다. 기껏 마지못해 한다는 말이, “그래도 문중어른들이 주시는 상인데, 가서 받으셔야지요” 할 뿐이다. 그 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해마다 시조님을 기리는 시제 때에 문중 대종회에서 그 해에 효부나 장한 어머니에게 상을 주는데, 당신께서 금년에 수상자로 선정되는 것이다.

연세가 올해 94세로, 연로하시기도 하지만 풍파 많은 가정을 잘 이끌어 오신 것을 높인 산 것이다. 하기는 틀리지 않을 것이, 젊어서는 선친께서 일제시대 보국대에 끌려가 신병을 얻은 바람에 십 수 년을 넘게 간병을 하시고, 지금은 얼굴조차 쳐들기가 죄송스러울 정도로 병이 깊은 내자의 뒷바라지를 떠안겨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서 상을 주신 것이기에 자식으로서는 더욱 면목이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옛 성현들도 불효 중에 제일가는 불효는 부모를 난처한 지경에 빠뜨리는 것이라 했는데,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입맛에 맞추어 무얼 사들인다한들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될 것인가. 벌써 노구를 이끄시고 병수발을 하신지가 어언 오년이다. 당신이 자청하신 일이긴 하나,그리고 효(孝)는 모름지기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양구체(養口體)보다는 하시고 싶을 일을 하도록 하는 양지(養志)의 효가 더 바람직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처지에 어찌 효(孝)를 입에 담을 것인가.

약 보름전이다. 대종회 총무로부터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하면서 수상사실을 통보해 왔다. 장한어머니상을 심사했는데 모친께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사람은 많지만, 반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병수발을 오래토록 든 사례는 드물어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상의 이름은 조양군상(兆陽君賞). 시조어른의 봉작명이다. 시조되시는 임세미(林世味)공은 내게는 24대조가 되시는 어른인데, 고려 말 대광찬성(大匡贊成) 좌복야(左僕射)을 지내셨다. 그러나 어수선한 정국속에서 참소를 입고 보성땅으로 내려오게 됐는데, 조정일을 보실 때는 포은 정몽주선생과 목은 이색선생등과 교유가 깊었다고 한다.

참소를 입고 낙향할 당대, 유명한 문인 조운흘(趙云屹)이 쓴 시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전해오고 있다.
紫門日午 喚開步
出林亭 座石苔
낮이 되어 사람 불러 싸리문 열 개하고
임정으로 걸어 나와 石苔에 앉았도다
하는 ‘떠나가는 조양군이여! '라는 시다.

조양임씨는 현재 국내에 1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시조묘는 보성군 벌교읍 낙안에 있다. 거기에서 시상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모시고 가야하나, 일 할 간병인을 구하지 못하여 조카 더러 모시고 가도록 했다.

돌이켜 보면 노모께서는 한석봉의 모친처럼 떡 장사를 하여 가계를 이끌거나, 공자의 모친처럼 남의 빨래를 해주면서 자식들을 돌보지는 않았지만, 가정에 풍파와 위기가 닥칠 때 작은 체구로 온전히 집안을 지켜내셨다. 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동생의 사업실패, 그리고 아내가 중풍으로 쓰러질 때도 사람 사는 일이 어디 만만한 게 있느냐며,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오는 법이라며 애써 쓰린 마음을 감추시고 의연하게 대처해 주셨다.

그런 노모가 오늘을 전혀 딴판이시다. “어머님, 마음 편히 다녀 오세요” “가기는 간다만 어찌 좀 마음은 그렇다” 조카가 모시려와 문밖을 나서면서도 당신은 여전히 불편하신 마음이다. 당신생각에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상 받는 게 좀 그렇다는 뜻이 역역하다. 그런 노모를 바라보며 아들인 나는 흐뭇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간 고생을 시켜드린 댓가라는 생각에 자꾸만 죄스러운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2008)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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