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에 제출하러 간 이기동(사진)씨
이범호 선생 손자 ‘나홀로’ 자료수집
보훈처, 지원은커녕 “서류 미비” 면박
보훈처, 지원은커녕 “서류 미비” 면박
그는 4년 전 그 일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오르고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10년 넘게 할아버지(이범호)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아 국가보훈처에 제출하러 간 이기동(사진)씨에게 돌아온 담당직원의 말은 이랬다. “자꾸 귀찮게 굴려면 다 필요 없다. 자료 도로 다 가져가라.”
사연은 이랬다. 1994년 5월 어느 날, 상주보훈지청에서 ‘호적등본 등 제출’이란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귀하의 조부이신 이범호님께서 독립운동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우리 지청에서 독립유공자의 본적지 읍면사무소와 협조해 제적부와 호적부는 찾았으나, 독립유공자 포상심사에 필요한 평생이력서가 없어 안내하오니 별첨 서류 1통을 작성하여 우리 지청 관리과로 94.5.30까지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범호(1890년생) 선생은 1910~18년 상주, 풍기 일대에서 광복단 조직단장으로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조선총독부 요시찰 대상이 돼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34년께 전투 중 사망했다. 이런 사실은 <대한독립항일투쟁 총사>와 당시 <동아일보> 보도, 조선총독부 경무국 인명부 등에 나와 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숨진 게 문제였다. 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주활동 무대여서 이씨 부친(해준-1954년 사망) 등 유족들이 이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쉬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씨는 “강원도로 충청도로 떠돌아 살 때도 할아버지 일로 경찰들이 종종 찾아와 이것저것 묻고 가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보훈처에서 조부의 자료를 찾아 제출하라는 공문을 보내온 것이다.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느껴졌다’는 이씨는 그날 이후 부산의 정부문서보관소를 비롯해 안동, 대전, 서울 등지의 대학과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한번 나서면 사나흘씩 돌아다닌 적이 백번도 더 된다. 한 5천만원쯤 길에 뿌린 것 같다”는 그는 초등학교 1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여서 남의 도움을 받느라 경비도 이중으로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힘들게 자료를 찾아 제출하면 보훈처는 그때마다 “자료가 부족하다” “구체적 활동이 미비하다” “행적이 불확실하다”며 퇴짜 놓기 일쑤였다. 이씨는 2003년 2월엔 주한 러시아대사관에 ‘국제민원신청’을 내 조부의 러시아 내 행적조회를 의뢰하기도 했다. 물론 이때도 한국 정부의 도움은 받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해 2월 국가보훈처장 명의의 ‘2007년도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 안내’ 공문이 날아왔다. ‘구체적 활동 내용에 대한 입증자료 미비’로 추가로 공적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제출되면 다시 심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3년째 매번 똑같은 답이었다. “이젠 오기가 생겨 끝까지 해보려 한다”는 이씨는 “나라에서 도와주진 못할망정 되레 면박을 줄 수 있냐”고 향변했다. “언젠가 보훈처 직원들이 자기 조상 서류를 가짜로 꾸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는 기사를 봤을 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고도 했다.
선친이 조부를 찾아 일본·중국 등지로 헤매다 귀국해서는 곧 숨지는 바람에 어려서부터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는 그는 “94년 강원도 사북을 떠나 고향 상주 땅에 돌아오기까지 내 인생 절반 가까이 탄가루를 벗 삼아 살아왔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자부심으로 버텨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상주/글·사진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