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NA 분석 180년 진위논쟁 끝
18세기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쉴러(1759~1805)의 것으로 추정돼온 유골이 가짜로 최종 확인됐다. 아울러 쉴러 사후 21년인 1826년부터 180년간 이어져온 진위 논쟁도 마무리됐다.
독일 고전주의 유산에 대한 보호 활동을 펴고 있는 바이마르재단의 대변인인 줄리아 글레스너는 3일 “디엔에이 분석결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쉴러의 두개골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쉴러의 것으로 알려져 이번 검사에 사용된 유전 물질은 독일 중부 바이마르의 한 묘지에 있던 두개골에서 채취된 것으로, 아들과 손자 등의 유전물질과 대조작업이 이뤄졌다. 이 두개골은 쉴러 사후 21년 만에 바이마르의 한 왕립 공동묘지에서 그의 애호가들이 찾아낸 것이며, 겉모습이 닮았다는 이유로 그동안 쉴러의 것으로 대접을 받아왔다.
쉴러의 유골을 둘러싼 논란은 1826년에 비롯됐다. 당시 바이마르 시장은 쉴러의 무덤이 있던 왕립 공동묘지에서 23기의 유골을 수습한 후 이 가운데 가장 큰 두개골을 쉴러의 것이라고 지목했지만 1911년 이 묘지에서 또다른 유골이 수습되고 이 유골이 쉴러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쟁이 일었다. 앞서 1911년 발굴돼 쉴러의 것이라고 주장돼온 또다른 두개골 역시 다른 사람의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바이마르 재단은 독일 엠디아르(MDR)방송과 공동으로 이번 작업을 벌여왔는데 일부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무덤이 파헤쳐져야 하느냐는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살아있는 쉴러의 직계 후손이 없는 만큼 이미 숨진 장남과 손자 등의 유해에서 디엔에이를 채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쉴러는 자유롭게 작품을 쓰기 위해 탈영을 감행, 평생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불평등에 초점을 맞춘 희곡 작품들을 쓰는 등 극작가와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연합뉴스
한편 바이마르 재단은 독일 엠디아르(MDR)방송과 공동으로 이번 작업을 벌여왔는데 일부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무덤이 파헤쳐져야 하느냐는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살아있는 쉴러의 직계 후손이 없는 만큼 이미 숨진 장남과 손자 등의 유해에서 디엔에이를 채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쉴러는 자유롭게 작품을 쓰기 위해 탈영을 감행, 평생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불평등에 초점을 맞춘 희곡 작품들을 쓰는 등 극작가와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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