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도보순례단(사진)
짧은 백발과 그을린 구릿빛 얼굴 탓이었을까. 유흥식 주교의 첫 인상은 강인하면서도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2003년 50대 초반에 대전 가톨릭대 총장에서 대전교구 부교구장 주교로 ‘발탁’되면서 한국 천주교를 이끌 ‘젊은 리더’로 떠오른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현장에서 뛰는 추진력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는 올해 대전교구 설정 60돌을 맞아 대전·충남지역의 성지도보순례단(사진)을 앞장서 이끌면서 얻은 ‘훈장’이다. 우리 나라 첫 사제이자 순교성인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가인 당진 솔뫼성지를 비롯해 유난히 많은 지역내 순교성지들을 찾아 다니는 이 순례행사는 하루 20km를 걷는 강행군인데도 점점 따르는 행렬이 늘어나 매회 1500~2000명을 헤아리고 있다.
그는 60돌을 계기 삼아 북한을 포함한 대외 원조기금 조성을 위한 ‘한끼 100원’ 기도운동도 펼치고 있다. ‘자선이 곧 복음이고 최고의 사랑이니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는 것이 곧 복음을 사는 것’이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다. 그 자신 가톨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물론, 한때 홀어머니의 내침을 받으면서까지 사제가 된 것도 ‘자선’ 덕분이었던 까닭이다.
194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그는 가난한 형편 탓에 장학금이 후한 대건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신앙은 없었던 그는 고 2 때 장학금을 보내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자선’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 차츰 김대건 신부의 삶에 “매료”된 끝에 가톨릭대학에 진학했다. 입학 초기 한 때 방황도 했던 그는 이탈리아에서 온 ‘포콜라레’(벽난로 공동체) 운동가들 덕분에 영성을 깨닫고 그들의 초청으로 로마 교황청립 라테란대학과 대학원에서 유학하며 종신서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당선된 대전·충남지역 국회의원 16명 가운데 10명이 가톨릭 신자라고 소개한 그는 종교 지도자로서 ‘그들이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일일히 편지를 써주었단다. “대화·타협·양보로 어려운 서민들이 살아갈 길을 열어 달라. 어디든 갈라놓기보다는 하나로 일치하게 해 달라.”
김경애 기자, 사진 천주교 대전교구 홍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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