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차(오른쪽)씨가 16일 오후 자신이 후원하는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한 독거노인 집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선행은 전염 된다나? 전재산 주더라고”
35년전부터 나눔의 삶 실천
자식들 이어 친구도 뜻 함께 서울 마포구에 사는 이상차(68)씨는 최근 동갑내기 독거노인 조아무개씨의 상속인이 됐다. 폐지 등을 팔아 모은 700만원이 조씨의 전 재산이다. “못 받겠다고 버텼지만 ‘나한테 한 것만큼 다른 사람한테 해주면 된다’며 우기는데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그러곤 내가 하는 일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고 다짐을 받더라고. 선행은 전염이 된다나?” 평생 구두공장을 운영하다 은퇴한 이씨는 독거 노인 50명의 끼니를 책임지고 있다. 건물 임대료 등 자신의 월수입 450만원 가운데 150만원을 노인들이 먹을 쌀을 사는 데 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였지. 어머니가 ‘아무리 어려워도 나눠 먹자’며 못사는 동네 사람들 밥을 챙겼어. 신기한 건 그럴수록 구두는 더 잘 팔리더라고.” 난리 통에 월북한 이씨의 부친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열일곱 살 소년은 교복을 벗고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마포의 손바닥만 한 두 평짜리 방에서 시작한 구두공장을 서른 살이 채 안 돼 서울 명동까지 진출하게 됐다. 이씨는 대를 이어 ‘밥 나눔’의 선행을 이어갔다. 35년 전엔 서울 상계동 노인정에서 점심밥을 댔고, 20년 전부터는 독거노인들 집으로 다달이 쌀 포대를 나른다. 이씨는 자녀와 가족들한테도 ‘나눔의 삶’을 전염시켰다. 그는 자신이 학용품을 기증하는 마포의 한 보육원에 막 걸음마를 뗀 세 남매를 데리고 다녔다. 이씨는 “처음에는 서먹해하던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더니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런 이씨의 자녀들이 이젠 아버지를 대신해 이 보육원을 찾고 있다. 이씨의 자녀들은 대학에 입학한 뒤 각자의 전공에 맞춰 보육원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씨의 장녀는 보육원에서 만난 형제를 집으로 데려와 키우자며 단식투쟁까지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목을 맨 광경을 목격한 형제였지. 사정상 입양을 하진 못했지만 딸이 유학을 간 뒤에도 그 아이들과 연락을 하며 지내더라고.” 이씨의 나눔은 다른 이들한테도 전염되기 시작했다. 마포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이씨의 오랜 친구 김아무개(69)씨는 지난해에야 이씨의 선행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김씨는 그 뒤로 동사무소에 한 달에 쌀 한 포대씩을 기부한다. 이씨는 “아이들이 내가 하던 일을 물려받겠다고 하니, 이젠 내가 없어도 노인분들이 굶을 걱정 없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김도성 취재·영상팀 피디 haha@hani.co.kr
자식들 이어 친구도 뜻 함께 서울 마포구에 사는 이상차(68)씨는 최근 동갑내기 독거노인 조아무개씨의 상속인이 됐다. 폐지 등을 팔아 모은 700만원이 조씨의 전 재산이다. “못 받겠다고 버텼지만 ‘나한테 한 것만큼 다른 사람한테 해주면 된다’며 우기는데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그러곤 내가 하는 일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고 다짐을 받더라고. 선행은 전염이 된다나?” 평생 구두공장을 운영하다 은퇴한 이씨는 독거 노인 50명의 끼니를 책임지고 있다. 건물 임대료 등 자신의 월수입 450만원 가운데 150만원을 노인들이 먹을 쌀을 사는 데 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였지. 어머니가 ‘아무리 어려워도 나눠 먹자’며 못사는 동네 사람들 밥을 챙겼어. 신기한 건 그럴수록 구두는 더 잘 팔리더라고.” 난리 통에 월북한 이씨의 부친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열일곱 살 소년은 교복을 벗고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마포의 손바닥만 한 두 평짜리 방에서 시작한 구두공장을 서른 살이 채 안 돼 서울 명동까지 진출하게 됐다. 이씨는 대를 이어 ‘밥 나눔’의 선행을 이어갔다. 35년 전엔 서울 상계동 노인정에서 점심밥을 댔고, 20년 전부터는 독거노인들 집으로 다달이 쌀 포대를 나른다. 이씨는 자녀와 가족들한테도 ‘나눔의 삶’을 전염시켰다. 그는 자신이 학용품을 기증하는 마포의 한 보육원에 막 걸음마를 뗀 세 남매를 데리고 다녔다. 이씨는 “처음에는 서먹해하던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더니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런 이씨의 자녀들이 이젠 아버지를 대신해 이 보육원을 찾고 있다. 이씨의 자녀들은 대학에 입학한 뒤 각자의 전공에 맞춰 보육원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씨의 장녀는 보육원에서 만난 형제를 집으로 데려와 키우자며 단식투쟁까지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목을 맨 광경을 목격한 형제였지. 사정상 입양을 하진 못했지만 딸이 유학을 간 뒤에도 그 아이들과 연락을 하며 지내더라고.” 이씨의 나눔은 다른 이들한테도 전염되기 시작했다. 마포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이씨의 오랜 친구 김아무개(69)씨는 지난해에야 이씨의 선행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김씨는 그 뒤로 동사무소에 한 달에 쌀 한 포대씩을 기부한다. 이씨는 “아이들이 내가 하던 일을 물려받겠다고 하니, 이젠 내가 없어도 노인분들이 굶을 걱정 없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김도성 취재·영상팀 피디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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