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고등법원.
사회변화 못따라가는 보수적 판결 줄줄이
대법원서 원심 파기환송 잇따라 ‘망신살’
대법원서 원심 파기환송 잇따라 ‘망신살’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송두율 교수 사건 등 이목을 집중시킨 주요 사건들에서 최근 대법원이 잇따라 원심을 파기하면서, 항소심 판결을 내린 서울고법이 무색해지고 있다. 대법원이 하급심보다 보수적이고 온정적인 판결을 내리는 게 ‘사법 관행’이었지만, 최근에는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결 성향이 뒤바뀐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엄정한 판결을 추구하겠다는 법원의 거듭된 ‘다짐’을 거스르는 서울고법의 판결은 특히 화이트칼라 범죄 사건에서 두드러진다. 대법원은 지난 15일 그룹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 회사에 수백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김준기(64) 동부그룹 회장 사건에서 “자사주 거래도 배임행위에 해당한다”며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고법은 2005년 김 회장의 자사주 거래를 무죄로 판결하면서 “국가경제에 기여한 점”을 집행유예 이유로 삼았다. 정몽구 회장에게 거액의 사재 출연 등을 전제로 집행유예를 선고한 항소심 결과가 지난달 대법원에서 깨진 것도 관대한 판결에 제동이 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3월 서울고법은 불법 후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벌금 500만원과 추징금 1천만원을 선고받은 이재용(54) 당시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게 벌금 80만원, 추징금 1천만원을 선고하며 “구청장, 환경부장관,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뛰어난 업무처리능력 등을 보여 온 점”을 감형 사유로 들었다. 정치자금법 위반죄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5년 동안 피선거권이 박탈되는데, 이 판결로 피선거권을 유지하게 된 이씨는 판결 직후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는 “판결문 어디에도 이재용씨의 ‘뛰어난 업무처리능력’을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며 “고질적이고 무책임한 양형 판단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힘겹게 쌓아올린 사회의 개방성을 무너뜨린 판결도 있다. 학내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다 퇴학당하자 학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강의석(22)씨는 지난 8일 항소심에서 1심과 달리 패소했다. 재판부는 “사립학교는 국·공립학교와 달리 특정 종교교육이 폭넓게 허용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직업법관들로만 구성된 고등법원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그는 “진보 성향의 인사를 받아들여 이념적 균형이 상대적으로 갖춰진 대법원과 달리, 엘리트 부장판사들이 주축을 이룬 고등법원은 보수적·일률적 관점에 얽매여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도 “오랫동안 직업법관 생활만 한 고등부장판사들이라 판결에 사회 변화를 잘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15일에는 법조비리에 연루된 부장판사가 내린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되기도 했다. 대법원은 한국철망공업협동조합이 부당한 계약으로 조합에 수억원의 손해를 끼친 강아무개 전 전무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 승소를 패소로 바꾼 항소심 판결을 파기했다. 당시 항소심 재판장은 법조브로커한테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조관행 전 부장판사였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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