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섭진(왼쪽) 이섭진 영세불망비’(오른쪽)
영동 영화마을 주민 탈출시킨 이섭진 주임 추모 반세기
충북 영동군 용화면 민주지산 아래 용화마을 어귀에는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오른쪽)가 있다. 이 비석은 1952년 11월11일 당시 영동경찰서 용화지서 이섭진(왼쪽) 주임의 공을 기려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강직하고 현명하게 일하고, 어질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다/길 위에 비를 세워 영원히 그의 공을 잊지 않겠다.” 한자 32자로 된 비문에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사지에 내몰린 마을 주민들을 목숨을 걸고 구한 이 주임의 인간애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한국전쟁 초기 50년 7월20일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과 석쟁이재, 상촌면 고자리에서 보도연맹원 300여명이 처형되는 등 피바람이 몰아쳤다. 산골 오지인 용화마을에도 “보도연맹원 소집 교육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통보와 함께 경찰들이 들어닥쳤다. “땅을 나눠 주겠다”, “비료를 배급해 준다”는 말에 속아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주민 30여명은 용화지서로 끌려갔다. 강제 처형을 직감한 이 주임은 나무 널빤지로 허술하게 메운 창고에 주민들을 수용한 뒤 주민 한 명을 불러 칼·가위 등을 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칼 등으로 널빤지를 뜯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게. 이유는 묻지 말고, 절대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안 되네.” 주민들은 이 주임의 도움으로 이날 밤 모두 탈출해 목숨을 구했다. 이 주임의 선행은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전쟁 끝 무렵 마을 주민들이 모금에 나서 비를 세웠다. 이 마을 토박이 박정현(75)씨는 “전쟁 때 경찰 신분으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보도연맹원을 탈출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마을 주민들은 비석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을과 조상을 살린 고마움에 고개를 숙인다”고 말했다. 충북지역 보도연맹 사건 등 민간인 학살 사건 진상을 캐고 있는 충북역사문화연대는 이 주임의 비문을 한글로 번역해 안내판을 세우는 등 이 주임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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