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 해방의 길 학문으로 닦아
종속이론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75살을 일기로 지난 23일 숨진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유럽 룩셈부르크에 살고 있는 유족들은 프랑크의 개인 인터넷 홈페이지( http://rrojasdatabank.info/agfrank )를 통해 “암과 싸우던 고인이 사망 2주전까지도 집필 작업을 벌였지만, 최근 급속히 기력이 쇠약해진 끝에 23일(현지 시각) 새벽 사망했다”고 전했다. 가족들이 주관한 장례식은 26일 룩셈부르크 화장터에서 치러졌다. 남미 ‘저개발’ 문제 천착
60년대 종속이론 주창
칠레 아옌데정부 이론가
1960년대 종속이론을 주창해 세계 사회과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프랑크의 죽음은 그러나 국내 언론은 물론 주요 외신을 통해서도 전혀 보도되지 않아, 좌파 지식인의 마지막 길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빈곤 문제를 ‘종속심화’에 의한 ‘저발전의 심화’의 틀로 설명해, 종속이론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종속이론은 미국·유럽 사회를 모델로 한 근대화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자리를 잡았고, 제3세계는 물론 전세계 진보·좌파 진영에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70여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다양한 학문분과를 넘나드는 인문주의자의 전형, 국경과 민족 구분을 뛰어넘는 코스모폴리탄의 면모,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고민한 진보적 학자의 풍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9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나찌 박해를 피해 1941년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학문 여정을 시작했다. 특히 1962년부터 10여년간 브라질·멕시코·칠레 등 남미 여러 나라의 유수한 대학에 교수로 초빙돼, 남아메리카 저발전의 문제에 천착했다. 1968년 칠레대학 교수로 재임하던 시절엔 칠례 아옌데 정부의 이론가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으며, 군부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가 붕괴하자 1973년 남미를 떠났다. 80년대 국내학계 영향
‘사회구성체’ 논쟁촉발
이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대학의 교수를 맡은 그는 평생을 통틀어 북미 9개 대학, 남미 3개 대학, 유럽 5개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인류학·경제학·지리학·역사학·국제관계학·정치학·사회학 등을 강의했다. 1980년대 이후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으며, 사망 직전까지 미국 노스웨스턴대 세계역사연구소 원로교수를 맡았다. 한국에 남겨진 프랑크의 족적은 특히 각별하다. 프랑크의 종속이론은 1970년대 말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몇몇 진보적 학자들은 종속이론의 틀을 적극 수용해 한국 자본주의의 대외종속성을 규명하는 연구를 내놓았다. 이후 한국 사회과학계는 한국 자본주의 성격을 둘러싼 일대 논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80년대 후반을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이다. 당시 등장한 주변부자본주의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식민지반봉건사회론 등은 대부분 종속이론의 문제의식에 빚을 지고 있었다. 프랑크는 지난 2월 광주에서 열린 ‘아시아 문화심포지엄’에 참석해 특별 강연을 할 예정이었으나, 병세가 악화돼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대신 보내온 영상연설문에서 그는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먼저 미국이라는 제국이 무너져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를 위해 아시아와 유럽의 ‘연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평생 동안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놓지 않았던 프랑크가 남긴 마지막 연설이기도 했다. 종속이론의 기념비적 저서로 평가받는 <저개발의 개발>(1966), <남미의 자본주의와 저발전>(1971년)을 비롯해 20여권의 저서와 수백편의 논문 및 에세이를 남겼고, 지난 2003년 <리오리엔트>(도서출판 이산)가 국내에 번역됐다.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종속이론 창시자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75살을 일기로 지난 23일 숨진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유럽 룩셈부르크에 살고 있는 유족들은 프랑크의 개인 인터넷 홈페이지( http://rrojasdatabank.info/agfrank )를 통해 “암과 싸우던 고인이 사망 2주전까지도 집필 작업을 벌였지만, 최근 급속히 기력이 쇠약해진 끝에 23일(현지 시각) 새벽 사망했다”고 전했다. 가족들이 주관한 장례식은 26일 룩셈부르크 화장터에서 치러졌다. 남미 ‘저개발’ 문제 천착
60년대 종속이론 주창
칠레 아옌데정부 이론가
1960년대 종속이론을 주창해 세계 사회과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프랑크의 죽음은 그러나 국내 언론은 물론 주요 외신을 통해서도 전혀 보도되지 않아, 좌파 지식인의 마지막 길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빈곤 문제를 ‘종속심화’에 의한 ‘저발전의 심화’의 틀로 설명해, 종속이론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종속이론은 미국·유럽 사회를 모델로 한 근대화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자리를 잡았고, 제3세계는 물론 전세계 진보·좌파 진영에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70여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다양한 학문분과를 넘나드는 인문주의자의 전형, 국경과 민족 구분을 뛰어넘는 코스모폴리탄의 면모,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고민한 진보적 학자의 풍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9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나찌 박해를 피해 1941년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학문 여정을 시작했다. 특히 1962년부터 10여년간 브라질·멕시코·칠레 등 남미 여러 나라의 유수한 대학에 교수로 초빙돼, 남아메리카 저발전의 문제에 천착했다. 1968년 칠레대학 교수로 재임하던 시절엔 칠례 아옌데 정부의 이론가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으며, 군부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가 붕괴하자 1973년 남미를 떠났다. 80년대 국내학계 영향
‘사회구성체’ 논쟁촉발
이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대학의 교수를 맡은 그는 평생을 통틀어 북미 9개 대학, 남미 3개 대학, 유럽 5개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인류학·경제학·지리학·역사학·국제관계학·정치학·사회학 등을 강의했다. 1980년대 이후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으며, 사망 직전까지 미국 노스웨스턴대 세계역사연구소 원로교수를 맡았다. 한국에 남겨진 프랑크의 족적은 특히 각별하다. 프랑크의 종속이론은 1970년대 말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몇몇 진보적 학자들은 종속이론의 틀을 적극 수용해 한국 자본주의의 대외종속성을 규명하는 연구를 내놓았다. 이후 한국 사회과학계는 한국 자본주의 성격을 둘러싼 일대 논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80년대 후반을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이다. 당시 등장한 주변부자본주의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식민지반봉건사회론 등은 대부분 종속이론의 문제의식에 빚을 지고 있었다. 프랑크는 지난 2월 광주에서 열린 ‘아시아 문화심포지엄’에 참석해 특별 강연을 할 예정이었으나, 병세가 악화돼 끝내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대신 보내온 영상연설문에서 그는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먼저 미국이라는 제국이 무너져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를 위해 아시아와 유럽의 ‘연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평생 동안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놓지 않았던 프랑크가 남긴 마지막 연설이기도 했다. 종속이론의 기념비적 저서로 평가받는 <저개발의 개발>(1966), <남미의 자본주의와 저발전>(1971년)을 비롯해 20여권의 저서와 수백편의 논문 및 에세이를 남겼고, 지난 2003년 <리오리엔트>(도서출판 이산)가 국내에 번역됐다.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