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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어린이에게 ‘어린이날’이 과연 필요한가?

등록 2005-05-03 11:09수정 2005-05-03 11:09

지난해 어린이날 서울시내 한 놀이공원에는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땅에서 부터 31m까지 회전해 올라갔다 10초만에 떨어지는 자이로드롭을 탄 어린이들이 흥분을 검추지 못하고 있다.이승경 기자 yami@hani.co.kr
지난해 어린이날 서울시내 한 놀이공원에는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땅에서 부터 31m까지 회전해 올라갔다 10초만에 떨어지는 자이로드롭을 탄 어린이들이 흥분을 검추지 못하고 있다.이승경 기자 yami@hani.co.kr


[진단] 365일이 특별한 요즘 아이들, 웬 어린이날?

“5월만 되면 머리가 아파요. 올해는 무슨 선물을 해주고 어디서 놀아줘야 하나? 아이들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텐데….” (서울 노원구 학부모 김영환씨)

“어린이날이요? 학교에서 작은 체육대회 하고, 여유가 있는 학교는 공책이라도 나눠주고 끝나죠. 아이들은 어린이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서울시내 초등교사 박아무개씨)

“사람들이 화이트데이, 발렌타인데이라고 정해놓고 몰리는 것이나 어린이날이 다른 것이 뭐가 있나요. 선물 보따리 안겨 주고, 놀이동산 가서 하루종일 시달리고… 이런 식이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겠어요.”(전남 목포 학부모 양애경씨)

어김없이 찾아오는 어린이날 ‘몸살’은 이렇게 어른들의 고민으로 시작된다. 서울 근교의 놀이공원이 북적거리고, 극장가, 쇼핑가, 공연장은 어린이날 ‘대목장사’다.

아이들이 어린이날 가장 받고 싶은 선물 목록은 어김없이 신문과 방송의 화제 기사에 올랐다. 올해 한 생명보험회사가 서울시내 초등학교 어린이회장(6학년)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어린이날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휴대전화(32.2%)였다. 애완동물(13.6%), MP3 플레이어(9.6%), 옷(8.8%), 쇼핑(7.5%), 컴퓨터(6.0%), 상품권(5.6%), 게임기(3.5%) 등이 뒤를 이었다.


어느덧 어린이날은 많은 가정에서 선물의 날이 되고, 놀이동산 가는 날이 되었다.

어린이날의 사전적 의미는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고, 어린이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선물과 놀이동산이 얼마나 어린이의 인격과 행복에 기여를 하는가? 우리 사회도 그런 문제를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80여년전인 1923년 이 땅에 ‘어린이날’을 처음 만들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오늘의 어린이날 풍경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체, 노동을 없애고 배우고 즐기게 하라”
1923년 소파 방정환이 식민지 조선에 어린이날을 만든 이유는?

▲ 소파 방정환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1923년 5월1일 오후3시. 서울 종로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어린이와 어른 1000여명이 모여 식민지 조선에서 첫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을 마친 참석자들은 광화문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는데, 그들이 든 깃발에는 ‘어린이 해방’이라는 붉은 구호가 선명했다.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제사회가 어린이 권리에 본격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보다 앞선 것이었다. 1924년 국제연맹회의에서 아동권리선언이 나왔고 미국은 1930년에야 어린이헌장을 발표했다.

소파 방정환, 김기전 등 어린이운동의 선구자들은 당시 ‘어린이 선언’에서 “어린이를 완전한 인격으로 예우하고, 14세 이하의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을 없애고,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겁게 놀기에 마땅한 여러 가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정환은 장유유서의 봉건이데올로기가 강한 식민지 조선사회라는 이중의 굴레에서 힘겨운 가사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들에게 ‘어린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아이들을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하늘’처럼 떠받들고, 배우고 즐겁게 놀 권리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는 ‘어린이날’을 제정해 어린이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고자 했다.

방정환은 어린이날 제정과 함께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전국 곳곳을 돌며 번안한 외국의 동화를 읽어주고 문학작품 활동을 하면서 어린이들의 권익 보호에 짧은 생을 받쳤다. 그가 쓴 1924년 ‘어린이 찬미’에는 “어린이를 하늘처럼 섬기라”는 그의 사상이 잘 묻어난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삶,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다.”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이땅에 처음 만들었던 것은 이처럼 봉적적 윤리의 압박과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어린이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의미를 뚜렷하게 담고 있었다.

“지금은 날마다 어린이날…이젠 어린이날을 없애자”
“내 아이 최고로” 부모의 욕망이 고독한 존재로 내몰아

▲ 피곤에 지친 아빠와 아이가 놀이공원 벤치에 앉아 졸고 있다. 이승경 기자.
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80여년이 지난 1999년 한 재야 철학자는 ‘어린이날을 없애야 한다’는 도발적 화두를 던졌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당시 서울대 강사)는 <한겨레>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서구의 어떤 나라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보호, 많은 교육, 많은 사랑을 어린이들에게 퍼붓고 있다. 이제 우리의 어린이는 이 세계의 제왕이 되었다. 정말 매일매일이 어린이날이 아니냐. 그렇다면 어린이날이 따로 있을 이유 또한 충분히 사라진 게 아닐까?”

고도로 물질화되고 핵가족화가 급진전된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어린이는 봉건적 압박과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아이를 세상 최고로”만들기 위해 온갖 방법이 총동원되는 세상에 아직도 어린이날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던진 것이다.

이 교수는 사회적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 ‘부모들의 욕망’이 아이들을 고독한 존재로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부모들의) 기획과 예정된 일정에 따라, 학교·학원 같은 예정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삭막하고 깨끗한 거리 사이에 떠 있는 몇몇 섬들뿐이다. 거기에서 형제마저 찾아보기 힘든 지금, 그들은 ‘제왕의 고독’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수의 주장은 6년 전 일이다. 그 이후 어린이날 풍경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 어린이날을 앞둔 지난해 5월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강당에서 2004세브란스 어린이 대잔치가 열려 입원중인 어린이들이 공연을 보며 잠시 병마를 잊고 즐거워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어린이날을 다시 생각하는 어른들
“사회의 아이들에게 의미를 넓혀야 진짜 어린이날”

4학년과 2학년 초등학생의 학부모인 양애경(37·목포시 산정동)씨가 어린이날을 보내는 방법은 여느 부모와 사뭇 다르다. 양씨 가족의 어린이날에는 선물도 놀이동산도 없다. 양씨 가족은 평소 휴일과 다름 없이 뒷산을 가볍게 산책하고, 시내에서 온 가족이 영화 한편 보는 것으로 어린이날을 보낸다.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인 ‘동화읽는어른모임’의 회원이기도 한 양씨는 어린이날이면 고아원이나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챙기는 일에 오히려 열심이다. 벌써 몇해째 이렇게 단촐한 어린이날을 보내고 있다.

양씨는 “고향이 없는 어른들이 명절에 더욱 힘들어 하듯 부모가 없는 시설의 아이들은 어린이날이 오히려 힘들다”며 “잘 먹고, 잘 입고 사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 여전히 못 먹고 헐벗은 우리 사회의 아이들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이 이 시대 어린이날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이날을 다시 생각하자는 학교 현장의 움직임도 시작되었다. 서울 미성초등학교 서진영 교사는 3년전부터 4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어린이날 공동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이날 공동수업은 아이들이 어린이날에 바라는 것, 어린이날의 유래, 아이들의 인권 등을 놓고 토론수업 방식으로 진행된다.

서 교사는 “요즘 어린이들은 과도한 학습노동과 가정에서 소외 등으로 조선시대보다 더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며 “어린이들이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어린이도서연구회 김옥선 사무총장은 “어린이날을 1회성 이벤트로 끝내면 순간적인 위로와 해방감을 줄 수 있겠지만 삶에서 이를 녹여낼 수 없다”며 “하루의 순간적인 해방감이 1년 내내 억압되어 있는 아이들의 교육에 결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사무총장은 “성적지상주의의 학교교육에서 벗어나 책읽기와 자연과 함께 놀기 등 아이들의 문화를 건강하게 되돌려 놓기 위해 어른들과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공론화하는 장이 어린이날을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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