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날을 앞두고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미성초등학교에서 어린이날의 의미와 유래 등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열린 \'어린이날\' 공동수업을 받은 6학년 9반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바라는 희망을 적은 색종이를 \'희망나무\'에 매달고 있다. 김정효 기자
[현장] 서울 미성초 6학년9반 25명의 ‘어린이날 소망’ "내려다보지 마시고 늘 보드랍게"
80여년전 어린이선언문 읽고 '하소연' “우리에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어요. 앞으로 더 많이 놀고, 쉬게 해달라고 어른들에게 주장할 거예요.”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미성초등학교 6학년9반 교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어린이날을 주제로 ‘계기수업’이 열리고 있었다. 수업은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어린이날의 의미를 말하고, 담임교사가 어린이날의 유래와 ‘어린이 선언문’을 설명한 뒤, 아이들끼리 토론을 벌이는 순서로 진행됐다. 서진영(27) 담임 교사가 “어린이날 무엇을 할 것인지”을 묻는 질문에 아이들의 대답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똑같았다. “놀이공원에 놀러가고 싶어요.” “선물을 받고 싶어요.” 겨우 세 명만이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겠다”, “시골 할머니집에 가겠다”,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겠다”며 다른 대답을 했다. 서 교사는 “이제 6학년인데 어린이날 선물이 꼭 필요하냐”고 물었다. 25명의 반 아이 가운데 어린이날 선물이 꼭 필요하다고 손을 든 아이는 15명, 선물이 필요 없다는 아이는 10여명 정도였다. 한 아이는 선물 대신 “만원짜리 지폐를 줬으면 좋겠다”고 해 친구들을 웃겼다.
서 교사는 “놀이공원 놀러가고, 선물을 받기 위해 어린이날이 생긴 것이 아니다”며 어린이날의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어린이날은 1923년 여러분이 잘 아는 방정환 선생이 만들었어요. 처음 어린이날 만들 때는 5월1일 노동절이 기념일이었죠. 당시 어린이들은 어른들하고 똑같이 일 하고, 못 먹고, 못 배우고 했어요. 그래서 어린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많이 배우고, 잘 먹고, 잘 자라서 훌륭한 사회의 일꾼으로 키워야 한다는 뜻에서 어린이날을 만든거죠.” 서 교사는 어린이날이 제정될 당시 만들어진 어린이선언문을 나눠줬다. 어린이선언문에는 “어린이를 완전한 인격으로 예우하고, 14세 이하의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을 없애고,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겁게 놀기에 마땅한 여러 가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또 어린이선언문에는 “어린이를 내려다 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 주시오. 어린이들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등 어른들에게 드리는 아이들의 호소문도 있었다. 80여년 전 어린이선언문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굴리며 듣던 아이들은 “어떻게 그 시대에 그런 요구까지 할 수 있었는지 상상이 안 된다”며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어린이날을 제정했던 일제 식민지 당시 배우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어른과 똑같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어린이들의 실태를 설명들은 뒤 그 시절 어린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슬기는 “엄마 아빠가 직장에서 일만 해서 이야기 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고, 정필이는 “학교 끝나고 학원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면 밤 8시가 돼서 숙제할 시간도 없다”며 “학원에 다니기 싫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현욱이는 “슈퍼에서 이것 사와라 저것 사와라, 쓰레기 버려라, 창문 열어라… 심부름하는 게 정말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에 대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진희는 “어른들에게만 존중받으면 안돼요. 친구들끼리도 서로 존중하고 인격체로 대해야 돼요”라고 말했고, 유진이는 “친구들, 꽃이나 풀을 꺾지 말아요. 동물을 학대하지 말고 사랑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 뒤 아이들이 쏟아낸, 어른들에 대한 요구사항은 80여년 전 어린이선언문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했다. “저희를 내려다 보지 마세요. 이놈 저놈 욕하지 마세요.” “공부만 시키지 말고 나가 놀게 해주세요.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실컷 놀고 싶어요.” “어린이를 유괴하거나 집에서 괴롭히는 어른들이 너무 싫어요.” “어린이날 뿐 아니라 1년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자신의 바람을 담은 글을 예쁜 색종이에 써서 학교 앞 동산에 서있는 나무에 주렁주렁 걸고, ‘희망나무’라고 이름붙였다. 서 교사는 “요즘 어린이들은 과도한 학습노동과 가정에서의 소외 등으로 조선시대보다 더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며 “요즘 아이들이 식민지 아이들의 권리와 인권을 지켜주려 했던 어린이날 제정 취지를 알고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이번 수업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어린이들은 하루하루 어린이날처럼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이제 그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어른들이 생각해볼 차례다.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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