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여년 동안 한국 어린이 수백명을 돌봐온 인진주(60)씨가 4일 충북 청원군 집에서 태양이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
한국서 20년 고아들과 함께한 스위스인 인진주씨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풍정리, 마른 흙이 풀풀 날리는 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유난히 개가 많은 허름한 농가가 나온다. 이곳이 반평생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한 ‘한국의 머더 테레사’ 인진주(60·본명 마가레트 닝게토)씨의 보금자리다. “금순이랑 루피는 버려진 강아지고요, 태양이는 옆집 개인데 자꾸 우리 집에 와서 제가 키우게 됐어요.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해 아이들은 돌보지 못하지만, 강아지들은 문제없어요.” 완벽한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인씨는 왜 이곳에 있을까?
"한국 너무 변해...지금 왔다면 여기 살지 않았을 것"
인씨가 한국을 처음 접한 것은 1972년, 스위스 베른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만난 한국인 동료를 통해서였다. 그들과 어울리며 한국말 배우는 재미에 빠졌던 그는 75년 휴가 때 처음 한국에 왔다. 가난하지만 인정이 많은 한국은 금방 그를 사로잡았다. “서울 동숭동 판자촌에 갔더니 아이스크림 하나를 어린이 열 명이 나눠먹더라고요. 스위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발을 뻗기도 힘든 방에 5~6명이 사는 동네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여 먹을 것을 나눠먹고, 지나가는 거지한테도 쌀 한숟가락이라도 꼭 나눠주고 그랬어요.” 30년전 서울 판자폰 첫구경
그때부터 ‘한국의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됐다. 85년 한국인 친구의 소개로 광주의 영진육아원에서 간호사 일을 시작했다. 40살 때였다. 첫 월급은 16만원. 스위스에서 받던 것에 견줘 형편없는 액수였다. 고아원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책에서만 봤던 이를 제 손으로 엄청 많이 잡았지요. 폐결핵에 걸린 5살짜리 아이도 있었고, 중이염이 방치돼 귀가 멀어버린 애도 있었고요.” 마음의 상처가 깊은 아이들에게 그는 최대한 골고루 사랑을 나눠주려 노력했다. 부모들이 참 나빠요
지금도 그는 96년 거리에서 직접 데려온 어린 남매를 잊지 못한다. 부모에게 버려진 뒤 길거리 생활을 하며 살던 남매는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투성이였다. 오빠는 지능지수가 60도 안됐고, 뇌까지 손상됐다. “부모들이 참 나빠요. 자기 살기 어렵다고 아이들을 때리고 버려요. 옛날에 더 가난할 때도 다 키웠는데, 버림받은 아이들이 어떤 눈빛인지 아세요?” 당시가 생각나는 듯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아이들의 가난과 외로움을 잘 이해했다. 스위스의 외딴 산골마을에서 자란 그의 어린 시절 역시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보육원에 맡겨질 정도의 궁핍한 생활과 부모와의 불화로 그는 15살 때 도시에 나와 홀몸으로 생활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가 지난 20년동안 언양, 용인 등 전국의 복지시설 6곳에서 키운 수백명의 아이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가족’이다. 관절염이 도진 2년 전 일을 그만두고 풍정리로 이사온 그는 아이들로부터 오는 문자메시지와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큰 낙이다. 20년 동안 그가 스위스에 간 것은 고작 세 번. 97년 어머니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스위스에 갔던 그는 그곳에서도 한국에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것이라고 말했지만 한국이 옛날만 못하다고 아쉬워했다. "요즘 TV광고 너무 한심"
“제 아들처럼 키우던 아이에게 휴대전화를 만들어 줬더니 수백만원이나 되는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갔어요. 제 믿음을 저버린 거죠. 보육원의 아이들도 유명 상표 옷이 아니면 입지 않으려 하고, 돈밖에 모르는 어른들을 닮아가요.” 그는 한국에 지금 처음 왔다면 아마 한국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가난했지만 나보다 조금 더 가난한 사람한테 밥 한끼라도 먹여주고 그랬잖아요. 요즘 텔레비전 광고 보면 너무 한심해요. 내 아이랑 남편 잘 돌보고, 좋은 집이랑 자동차 사고 그러려면 아내인 내가 건강해야 한다고 나오죠? 나만, 우리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거예요.” 세상은 변했지만 그의 ‘어린이 사랑’은 여전하다. 그는 지금도 스위스에서 나오는 쥐꼬리만한 연금을 쪼개 몽골과 베트남, 방글라데시 어린이 8명에게 매달 2만원씩 후원하고 있다. 청원/글·사진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풍정리, 마른 흙이 풀풀 날리는 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유난히 개가 많은 허름한 농가가 나온다. 이곳이 반평생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한 ‘한국의 머더 테레사’ 인진주(60·본명 마가레트 닝게토)씨의 보금자리다. “금순이랑 루피는 버려진 강아지고요, 태양이는 옆집 개인데 자꾸 우리 집에 와서 제가 키우게 됐어요.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해 아이들은 돌보지 못하지만, 강아지들은 문제없어요.” 완벽한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인씨는 왜 이곳에 있을까?
"한국 너무 변해...지금 왔다면 여기 살지 않았을 것"
인씨가 한국을 처음 접한 것은 1972년, 스위스 베른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만난 한국인 동료를 통해서였다. 그들과 어울리며 한국말 배우는 재미에 빠졌던 그는 75년 휴가 때 처음 한국에 왔다. 가난하지만 인정이 많은 한국은 금방 그를 사로잡았다. “서울 동숭동 판자촌에 갔더니 아이스크림 하나를 어린이 열 명이 나눠먹더라고요. 스위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발을 뻗기도 힘든 방에 5~6명이 사는 동네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여 먹을 것을 나눠먹고, 지나가는 거지한테도 쌀 한숟가락이라도 꼭 나눠주고 그랬어요.” 30년전 서울 판자폰 첫구경
그때부터 ‘한국의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됐다. 85년 한국인 친구의 소개로 광주의 영진육아원에서 간호사 일을 시작했다. 40살 때였다. 첫 월급은 16만원. 스위스에서 받던 것에 견줘 형편없는 액수였다. 고아원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책에서만 봤던 이를 제 손으로 엄청 많이 잡았지요. 폐결핵에 걸린 5살짜리 아이도 있었고, 중이염이 방치돼 귀가 멀어버린 애도 있었고요.” 마음의 상처가 깊은 아이들에게 그는 최대한 골고루 사랑을 나눠주려 노력했다. 부모들이 참 나빠요
지금도 그는 96년 거리에서 직접 데려온 어린 남매를 잊지 못한다. 부모에게 버려진 뒤 길거리 생활을 하며 살던 남매는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투성이였다. 오빠는 지능지수가 60도 안됐고, 뇌까지 손상됐다. “부모들이 참 나빠요. 자기 살기 어렵다고 아이들을 때리고 버려요. 옛날에 더 가난할 때도 다 키웠는데, 버림받은 아이들이 어떤 눈빛인지 아세요?” 당시가 생각나는 듯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아이들의 가난과 외로움을 잘 이해했다. 스위스의 외딴 산골마을에서 자란 그의 어린 시절 역시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보육원에 맡겨질 정도의 궁핍한 생활과 부모와의 불화로 그는 15살 때 도시에 나와 홀몸으로 생활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가 지난 20년동안 언양, 용인 등 전국의 복지시설 6곳에서 키운 수백명의 아이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가족’이다. 관절염이 도진 2년 전 일을 그만두고 풍정리로 이사온 그는 아이들로부터 오는 문자메시지와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큰 낙이다. 20년 동안 그가 스위스에 간 것은 고작 세 번. 97년 어머니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스위스에 갔던 그는 그곳에서도 한국에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것이라고 말했지만 한국이 옛날만 못하다고 아쉬워했다. "요즘 TV광고 너무 한심"
“제 아들처럼 키우던 아이에게 휴대전화를 만들어 줬더니 수백만원이나 되는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갔어요. 제 믿음을 저버린 거죠. 보육원의 아이들도 유명 상표 옷이 아니면 입지 않으려 하고, 돈밖에 모르는 어른들을 닮아가요.” 그는 한국에 지금 처음 왔다면 아마 한국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가난했지만 나보다 조금 더 가난한 사람한테 밥 한끼라도 먹여주고 그랬잖아요. 요즘 텔레비전 광고 보면 너무 한심해요. 내 아이랑 남편 잘 돌보고, 좋은 집이랑 자동차 사고 그러려면 아내인 내가 건강해야 한다고 나오죠? 나만, 우리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거예요.” 세상은 변했지만 그의 ‘어린이 사랑’은 여전하다. 그는 지금도 스위스에서 나오는 쥐꼬리만한 연금을 쪼개 몽골과 베트남, 방글라데시 어린이 8명에게 매달 2만원씩 후원하고 있다. 청원/글·사진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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