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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1 아빠가 슬기와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5-05-06 20:10수정 2005-05-06 20:10

슬기야, 아빠는 엊그제만 해도 어린아이처럼만 느껴지던 네가 고등학교를 입학한 요즈음은 종종 ‘우리 슬기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 고등학교 1학년이 지나면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데 ‘내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고, 또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첫 번째 중간고사를 긴장 가운데서 치르면서 시험문제 하나에 울고 웃는 너를 보면서 이제 우리 슬기도 불행한 한국의 고등학생, 대학입시라는 고통스러운 터널에 들어선 한국의 여고생임을 절감한단다.

슬기야, 그런데 요즈음 아빠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어. 엊그제부터 이번 토요일에 고등학교 1학년생들이 연다는 촛불집회에 대한 기사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고 있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어떤 신문에서는 너희들의 촛불행사를 “고등학교 1학년생의 반란”으로 표현했더구나? 친구들로부터 문제 메시지를 받은 너도 집회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빠에게 물었지? 아빠는 네 물음에 대해서 그 행사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너희들이 촛불을 들어야만 하는 그 절박한 현실을 아빠도 알고 있기 때문이야.

아마 너희들은 촛불행사를 통해서 “우리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겠니? 또 학교폭력과 억압적인 학교구조, 친구들을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겨야 하는 학교교육의 현실 때문에 매일 매일 죽어가는 친구들을 지켜보면서 이들의 죽음이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너희들의 절박한 고통을 어른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 아니겠니? 너희들이 그렇게 절박하게 ‘우리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해 주고, 우리도 숨을 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절규하는데 어떻게 아빠가 그 절규를 안 된다고만 하겠니. 때문에 아빠는 너희들의 촛불집회를 마냥 반대할 수는 없었단다.

하지만 슬기야, 너희들의 그 고통과 몸부림을 이해한다고 해도 이것만은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너희들의 촛불행사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구나. 너희는 촛불집회를 통해서 학교폭력과 억압적인 학교구조, 그리고 성적 때문에 죽어간 친구들을 추모하고 또 친구들 간의 과도한 경쟁을 하게 하는 내신등급제나 상대평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하지만 일부 불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너희의 순수한 뜻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어. 아빠는 그들이 지금 너희들을 이용하여 본고사 부활, 혹은 고교등급제 도입에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어. 그렇다면 슬기야, 본고사를 부활하고 고교등급제를 실시한다면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입시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아빠는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아니야. 그것은 절대로 아니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신이라는 족쇄 외에 본고사 준비라는 또 하나의 족쇄가 너희에게 채워질 것이고 학습부담은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해. 그리고 부모들이 부담해야 할 사교육비는 더욱 늘어나겠지.




또 아빠는 이런 걱정이 있어. 만약에, 만약에 이번 촛불행사 와중에 사고라도 나서 너희 중에 누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후유증을 가져 올 것이 분명한데 문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거야. 촛불행사가 밤중에 이루어지고 또 몇 명이나 참석하게 될지 알 수 없고, 질서 유지를 위한 방안도 현재로서는 마땅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염려만은 아닐꺼야.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너희의 절절한 주장은 온데간데 없이 어른들끼리 이것이 누구의 책임이냐를 두고 싸우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너희들에게도 그 책임을 물으려고 하게 될 꺼야.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잖니.

때문에 아빠는 촛불행사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말하고 싶은 너희들의 생각을 탓할 수는 없지만 너희들의 순수한 뜻이 왜곡되어 오히려 너희를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걱정이야.

슬기야. 그래서 아빠가 슬기에게 한 가지만 부탁하자꾸나. 너희의 뜻을 알겠다. 그리고 너희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고통스런 현실을 만든 것이 아빠의 세대라는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마. 또 너희를 그 고통스런 현실에서 구하기 위해 이제 아빠가 나서마. 그러니 우리 서로 한 발만 물러서자꾸나.

너희는 인터넷과 휴대전화 메시지를 통해서 너희의 의견을 드러내고 조직하는 등 정부도, 부모들도 간담이 서늘하게 했어. 지금까지 너희가 어른들의 간담을 이토록 서늘하게 한 적이 없었지. 그런 점에서 너희의 뜻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표현했다고 봐. 너희의 촛불 행사 때문에 총리가 관계 장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고, 언론이 너희 움직임 하나하나를 상세히 보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니? 그러니 무리하지는 말자꾸나. 정부와 부모에게 너희의 의견을 정리해서 전하고 위험부담이 너무도 많은 촛불집회만은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너희가 그렇게만 약속해 준다면 아빠가 약속하마. 만약에 이번에 너희들이 이렇게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아빠가 먼저 촛불을 들께. 그렇게 아빠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자.

슬기야. 아빠도 대학입시 때문에, 학교폭력 때문에, 학교의 억압적인 구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권리도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네 친구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또 이런 것들 때문에 시들어 가는 너의 소녀시절이 안타깝다. 아빠도 네가 일곱 개의 무지개 꿈을 꾸면서 즐겁고 기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고등학교를 마쳤으면 좋겠다. 너와 나 이렇게 생각이 다르지 않으니 이번에 조금씩만 서로 양보하고 함께 손잡아보자. 너를 위하여 그리고 아빠를 위하여.

(슬기양의 아버지 박경량씨는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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