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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어느 출소자의 죽음

등록 2005-05-07 12:49수정 2005-05-07 12:49

지난 1996년 2월21일, 한 젊은이가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른 다섯살, 아직 앞길이 창창한 나이였다. 김덕배. 나는 그날 이후 그의 이름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그의 죽음에 나 또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스물 세 살이던 1984년, 그는 인천의 어느 가정집에 들어가 흉기를 휘두르고 한 돈짜리 금반지와 현금 4천원을 빼앗은 혐의로 구속됐다. 대법원까지 간 재판에서 그는 줄곧 무죄를 주장했지만, 법정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이미 검찰조사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 참이었다. 그에겐 가벼운 절도전과도 있었다. 그는 징역 5년, 보호감소 6년을 포함해 모두 11년을 복역하고 1995년7월 만기출소했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한겨레>의 수습기자로서 일을 막 배우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경찰서에서 먹고자며 붙박이근무를 할 때였다. 어느날 선배로부터 서류가 가득 담긴 쇼핑백 하나를 건네받았다.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피의자진술조서 등 김덕배씨의 모든 재판관련 서류가 큰 쇼핑백 하나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틀밤을 새다시피하며 그의 서류를 검토했다.

현장에서 붙잡혔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검찰조사 초기 내내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절도 전과는 그에겐 덫이었다. 피해자는 그의 얼굴이 맞는 것 같다고 진술했고, 사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가게의 주인이 사건이 일어난 날 그를 봤다고 진술한 것이 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했다. 물론 김씨는 이런 주장을 반박했지만, 알리바이를 입증하지 못했다. 그는 십수일을 잠을 재우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인정한 것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형기를 모두 마친 사람이었다. 포기할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이리저리 뛰는 것은 분명 억울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는 출소뒤 피의자진술조서에 찍힌 지문이 자신의 지문과 다르다는 사설 감정기관의 감정서를 떼어놓고 있었다. 그는 "기사를 써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했다.

그의 말은 진실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사설감정기관의 감정서만으로 그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기사를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게 서류가 건네진 이틀 뒤, 나는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나는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재심 청구의 길을 찾는 쪽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서류를 챙겨 떠났다. 그리고 몇달 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한겨레>에 실렸다.

대통령에게 보낸 유서에 그는 이렇게 썼다. “죄없이 10년 이상 옥살이를 한 것이 억울하다. 나는 결백하다.” 그는 출소 뒤 청와대 민원실과, 명동성당, 언론사 등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의 진정서를 보내는 등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애써왔다고 기사에 쓰여 있었다. 나도 그가 만났던 여러 사람 가운데 하나다. 기대를 갖고 찾아온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나는 아직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김덕배씨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형사재판제도 개혁논란이다. 만약 피고인이 부인하는 피의자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법원이 인정하지 않았다면, 법정이 증인들의 증언을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면 김덕배씨는 어떻게 됐을까?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형사소송법 개정방향에 검찰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오늘, 목숨을 끊는 것 밖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던 못배우고 가난한 한 젊은이를 나는 다시 생각한다. 그가 진정 범인이었을까? 그러나 그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남구 <한겨레> 논설위원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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