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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2002년 상도동 철거민 망루농성 돌아보니…

등록 2009-01-22 19:13

경찰 “섣부른 불상사 우려” 신중
협상통해 자진해산뒤 경찰 출두
7년 만에 경찰의 대응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6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용산 재개발 지역 철거민 투쟁’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역시 극한적 망루 투쟁이 벌어졌던 2002년 상도동 철거민 투쟁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상도2동 재개발 지역의 철거민 투쟁은 2002년 한 건설업체가 가옥주 700세대, 세입자 500세대가 살던 상도동 주택가에 1100세대의 아파트를 짓기 위해 보상과 철거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150만원의 이주비로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던 세입자 20여명이 임시 거주시설과 영구임대주택 입주권을 요구하며 그해 7월부터 재개발 지역에 15m 높이의 철탑 망루를 세우고 농성에 들어갔다. 동작구청은 4개월이 지나서야 ‘불법건물 철거’를 위해 행정 대집행 영장을 발부받았다.

당시에도 이번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처럼 망루 위에서 농성중인 세입자들을 해산하기 위해 컨테이너가 동원됐지만, 이를 동원한 것은 경찰이 아니라 용역업체였다. 용역업체 직원들의 진입에 세입자들은 화염병과 염산을 던지고 고무줄총으로 골프공, 벽돌 등을 쏘며 맞섰다. 세입자들이 사제총을 사용한 흔적까지 드러났다. 그러나 경찰은 해당 지역에 가스공급을 끊고 단전조처를 취했을 뿐 경찰력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당시 경찰은 “농성자 가운데 할머니 3명과 네살짜리 어린이 3명이 포함돼 섣불리 진압하다가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세입자들은 1년5개월 동안 망루에서 버텼고, 2004년 1월20일 시행사와 동작구청이 세입자들에게 일정한 보상금과 임대주택 입주권을 주기로 약속하자 농성을 풀고 노량진경찰서에 자진 출석했다.

7년 뒤인 지난 1월20일 경찰은 세입자들의 농성이 시작된 지 불과 3시간30분만에 경찰특공대를 재개발 현장에 배치했고, 하룻만에 경찰병력을 세입자들이 농성을 벌이는 건물 옥상으로 투입했다가 6명의 희생을 낳았다. 당시 상도동 망루에서 농성을 벌였던 김진화(47)씨는 “이번 용산 참사를 보고 경찰의 태도가 예전과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며 “야만도 이런 야만이 없고, 차마 눈뜨고 지켜 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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