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나는 조합’의 조합원들이 경남 거제의 마이크로크레딧 소모임인 ‘해뜨는 바다’ 회원들이 일하는 알로에 농장을 찾아 현장 체험을 하고 있다. 신나는 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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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마이크로 크레딧’의 해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다 외환위기 때 직장을 잃고 알콜중독에 빠진 박정기(가명·44)씨는 수년 동안의 노숙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달 중순 새 삶을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의 노숙자 4명과 함께 서울 정릉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빌려 전자제품 수리점을 냈다. 박씨와 그의 동료들이 새 인생을 시작한 데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은 다름아닌 단돈 200만원이었다. 신용이나 담보가 있을 리 없는 노숙자 박씨에게 ‘적지만 큰 돈’을 빌려준 곳은 은행이 아니었다. ‘마이크로크레딧’(무담보 소액금융)을 펼치고 있는 국내의 한 시민단체였다. ‘마이크로크레딧’은 ‘돈 없는 사람들만을 대접’하는 금융서비스이다. 신용불량자나 실업자, 근로빈곤층 등 은행의 문턱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담보·무보증으로 소액을 대출하거나 투자하는 일종의 대안금융이다. 시민단체, 은행문턱 이들에 재활기회
금융당국, 개념도 잘 몰라…제도적 모색 필요 마이크로크레딧이 국내에서 관심을 끈 것은 외환위기 이후 빈부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고 카드 남발로 신용불량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이들의 재활과 자립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연합회의 집계를 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신용불량자는 360만명에 이른다. 지난 4월28일 신용불량자 등록제도가 폐지돼 ‘신용불량자’란 용어 대신 ‘장기금융연체자’란 표현을 쓰지만, 여전히 이들은 금융권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중은행들이 공유하고 있는 은행연합회의 정보망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신용불량자’가 아니더라도 전국 500만의 빈곤층과 저소득층(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은 ‘돈맥’이 꽉 막혀있다. 은행에서 어렵게 돈을 빌리더라도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한다. 신용도가 낮고 담보·보증도 없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면 카드로 급전을 조달하거나 사채업자에게 달려간다. 결국 ‘고리대금’의 늪에 빠져든다. 빈곤층의 이런 금융소외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됐다. 은행들은 대형화와 함께 단기수익성 위주로 영업을 하면서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과의 차별대우가 심해지고 있다. 상호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 등 전통적인 서민금융회사들은 시장영역이 축소된 데다가 부실운용으로 기능이 점차 위축되고 있다. 빈곤층의 금융 소외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한밭대 조복현 교수(경제학)는 “국내 금융회사들이 수익성 위주의 영업에 치중하면서 금융 소외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면서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기반이 될 무담보 소액대출제도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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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싹’ 대가는 연리 4% ‘신나는 조합’ 공동대출·자립상담
‘사회연대은행’ 규모·상환에 여유 부스러기사랑나눔회가 운영하는 ‘신나는 조합’은 지난 2000년 문을 열어 국내에 처음 ‘마이크로크레딧’의 씨를 뿌렸다. 이 단체의 강명순 대표가 1999년 방글라데시 그라민트러스트가 마련한 교육에 참가한 뒤 돌아와, 외환위기 직후 급증한 실직자·신용불량자를 위한 빈곤 퇴치 활동에 착수하면서부터이다. 신나는 조합은 그라민은행이 미국 씨티그룹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에서 5만달러를 받아 무담보·무보증 대출을 시작했다. 도시빈민·여성·알콜중독자·노숙자·장애인·신용불량자 등 은행으로부터 버림받은 소외계층에게 1인당 최고 500만원, 평균 200만원 정도를 빌려주고 있다. 금리는 연4%며, 상환은 매주 원금과 이자를 주간단위로 최장 100주 동안 나눠 조금씩 갚아나가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모두 148건에 걸쳐 2억5천여만원을 빈곤층에게 빌려줬다. 신나는 조합 이상희 팀장은 “개인 대출이 아닌 3~5명의 공동 대출 형식을 함으로써 상환 연체 위험을 줄여 현재 상환율은 92%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신나는 조합은 대출과 함께 빈곤층이 자활·자립할 수 있도록 상담과 자립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2002년에 출범한 사회연대은행은 여성노동자협의회, 와이더블유시에이 등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만든 마이크로크레딧이다. 이 곳은 주로 기업과 정부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저소득층 여성, 신용불량자, 성매매피해 여성 등 빈곤층의 창업 위탁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에는 삼성으로부터 10억원을 기부받아 소액 대출을 통한 저소득여성가정 창업지원 사업을 벌였다. 지금까지 96개 업체 창업을 성사시켰으며 올해는 100억원을 풀어 대출에 나설 계획이다. 사회연대은행은 1인당 대출금액이 500만~5천만원으로 신나는 조합보다는 많고 상환도 6개월 거치·30개월 상환으로 좀 여유가 있다. 이자율은 연 4%로 같지만, 공동 대출 뿐 아니라 개인 대출을 한다는 점도 신나는조합과 차이가 난다. 김성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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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돈 벌 사회적 장치 없기 때문”
서울 온 ‘그라민트러스트’ 라티프 총재
55% ‘빈곤탈출’…35개 나라에 도움 줘 지구촌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난 라티프 총재는 지난 1976년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대출을 하는 그라민은행 설립에 나섰다. 그라민은행은 현재까지 방글라데시의 절대 빈곤층 440만명에게 무담보·무보증 대출을 했고, 이 가운데 55%가 절대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라티프 총재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크레딧이 방글라데시에서 성공한 이유로 “가난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고, 그들에게 소액대출을 통해 자신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라민은행이 성공을 거두자 다른 나라 정부와 시민단체들도 그라민의 마이크로크레딧에 관심을 가지면서 조언과 도움을 요청하는 문의가 쏟아졌다. 그는 ‘그라민트러스트’라는 별도 기관을 세워 외국의 마이크로크레딧 단체·기관에 재정적·기술적 지원을 펼쳐왔다. 중국·인도·베트남 등 세계 35개 나라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30년 전에 ‘마이크로크레딧’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나라에서 이 제도를 활용해 빈곤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마이크로크레딧의 성공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한국에도 실직자와 신용불량자가 매우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힘을 가진 정부가 가난한 사람 하나하나가 변화할 수 있도록 법·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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