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 KT앞 평통사 반미연대집회 소송 끝 열려
‘장소 경합’ 이유 금지…경찰 자의적 법집행 눈총
‘장소 경합’ 이유 금지…경찰 자의적 법집행 눈총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였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등에서 오랜 시간 평화·인권 활동을 해온 백발의 노인들과 젊은 대학생, 아이를 안은 엄마 등 30여명이 16일 낮 12시 서울 세종로 케이티(KT) 광화문 지사 앞으로 모여들었다. 평화·반미 집회 때면 빠지지 않는 권오헌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의장이 자리를 지켰고, 80년대 운동권들의 ‘영원한 엄마’인 임기란 민가협 명예의장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참여했다.
평통사는 1999년 10월 미국 대사관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는 케이티 광화문 지사 앞에서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첫 집회를 연 뒤 10년 동안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반미 연대집회’를 열어왔다. 평통사는 지난달 116번째 집회를 평화롭게 마쳤고, 이달 117번째 집회를 예고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달 정부가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불허하겠다고 밝힌 뒤, 경찰은 갑자기 6월 집회를 금지한다고 알려왔다. 케이티가 ‘상품 홍보 및 환경 캠페인’ 집회를 신고해 ‘장소 경합’이 우려된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유영재 평통사 미군문제팀장은 “케이티 집회는 지난 1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다”며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경찰이 집회를 막으려 한다”고 반발했다. 평통사는 지난달 28일 서울행정법원에 집회금지 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냈고, 법원은 결국 “먼저 신고된 집회와 목적이 상반된다고 볼 수 없다”며 평통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열린 117번째 집회는 한-미 정상이 채택한 ‘한-미 동맹 미래비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발언 등으로 50분 정도 진행된 뒤 무사히 끝났다. 장소 경합이 우려된다던 케이티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
경찰은 한 장소에 집회 신고가 겹칠 경우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한쪽 집회를 금지해왔지만, 경찰의 간섭이 문제를 더 키운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는 지난 2월 임시국회 기간에 농협법 개정 문제로 서울 중구 농협 본사 앞과 여의도 국회 앞 등에서 ‘농업개혁 촉구 결의대회’를 연다고 신고를 냈다. 그러나 농협이 ‘방어 집회’ 신고를 해둔 탓에 10차례 넘게 불허 통보를 받았다. 뉴타운 개발문제로 시공사 금호건설과 갈등을 빚고 있는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재개발11구역의 가옥주철거대책위원회(철대위)도 종로구 금호건설 사옥 앞에서 하려고 낸 집회 신고가 장소 경합을 이유로 14차례나 퇴짜를 맞았다.
김광천 한농연 정책조정실 차장은 “결국 한 달 뒤 농협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할 때는 1천여명이 모였지만 집회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끝났다”고 말했다. 오경숙 철대위 부위원장도 “정말 경찰의 목적이 질서 유지라면 오전·오후로 나눠 시간을 배정하면 된다”며 “경찰이 억울한 시민들의 입을 틀어막아 좌절감만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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