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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열 공사 계획-중정 연수생 지휘 '치밀'
10만달러 주며 동유럽인 2인 끌어들여
김재규, 귀국한 연수생에 거액·보직 포상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재규 부장의 지시→이상열 공사의 계획 수립→유학생의 유인 및 현장 지휘→외국인에 의한 실행 등 치밀한 계획과 업무 분담을 통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살해됐다고 밝혔다. ◇ 가담자 물색과 계획 수립 : 1979년 9월~10월 초 = 김 중앙정보부장은 9월 말 이전 프랑스지역 중정 책임자인 이상열 공사에게 김 전 부장 살해를 은밀히 지시했다. 이 공사는 5~6명의 연수생들을 자택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는 등 시험을 거쳐 신현진(가명)과 이만수(가명)를 선택했다. 이 공사는 9월 말께 신현진을 불러 “김재규 부장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는데 자네가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임무를 설명했고, 신은 “어려움은 없습니다. 목표가 김형욱이죠?”라며 결의를 밝혔다. 신은 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유럽인 2명에게 김형욱 살해를 청부하며 10만 달러를 약속했다. 이 공사에게는 권총을 준비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이후 이 공사는 극비리에 귀국해 김 부장을 두 차례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이 공사는 살해에 사용할 소련제 소음권총과 독침을 받았다. ◇ 작전 실행일 : 1979년 10월 7일 = 이날 저녁 이 공사는 신을 급히 불러 “김형욱이 돈을 빌려달라는데 거절하려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돈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며 “두 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에서 김형욱을 만나기로 했으니 이만수와 일꾼들을 호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신은 이만수와 외국인 2명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만수에게 외국인에게 줄 10만달러를 가지고 개선문 근처 호텔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신은 이 공사의 관용차(푸조 604)를 운전해 조수석에는 이 공사를, 뒷좌석에는 외국인 2명을 태운 채 김형욱과의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김형욱을 살해하는 데 쓰일 권총과 독침이 외국인에게 전달됐다. 이 공사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김형욱을 만나 연수생과 외국인들을 “돈 빌려줄 사람”으로 소개한 뒤 자리를 떴다. 술에 취한 채 차에 오른 김형욱은 이동 중 외국인으로부터 주먹으로 뒷머리를 여러 차례 맞고 실신했다. 신은 파리 근교로 차를 몰아 인적이 드문, 작은 숲이 내리막 방향으로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김형욱은 외국인 2명에 의해 양쪽에서 부축 당한 채 차에서 끌어내려졌다. 외국인들은 김형욱을 숲속으로 끌고 갔고, 실탄 7발을 쏴 살해한 뒤 낙엽으로 시체를 가렸다. 30여분 뒤 외국인들은 신이 대기하고 있던 차량으로 돌아와 김형욱의 코트와 여권, 지갑, 시계 등을 건넸다. 신은 “잘했다”고 외국인들을 격려한 뒤 이만수가 대기하던 시내로 이동해 약속했던 10만달러를 건넸다. 신은 외국인들을 보낸 즉시 이 공사의 집으로 가서 임무 수행 결과를 보고했고, 이 공사는 “여권과 지갑은 내게 주고, 증거 인멸한 뒤 즉시 귀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뒷 마무리 및 포상 : 1979년 10월 8일~18일 = 즉시 사라지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것을 걱정한 신은 사건 3일 만인 10일 귀국길에 올랐다. 13일에는 이 공사의 친필을 휴대한 채 김재규 부장을 만났다. 김 부장은 이 자리에서 “수고했어. 그런 놈을 그냥 두면 우리 조직이 뭐 하는 곳이겠느냐”며 격려한 뒤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두 개씩 건넸다. 신은 뒤에 이 가운데 한개씩을 이만수에게 전달했다. 김 부장은 또 신에게 “근무하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은 뒤 “내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에 근무하면 어떻겠느냐”며 비서실장에게 인사발령을 명령했다. 김 부장은 또 “앞으로 장가도 가야할 텐데, 신혼살림을 하려면 한 40~50평 정도면 되겠냐”며 “집을 알아본 뒤 내 비서에게 전화하면 조치해주겠다”고 말했다. 이만수도 비슷한 시기 김일곤 차장보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거금을 격려금으로 받았다. 한편, 이상열 공사는 18일 은밀히 귀국해 김재규 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한 뒤 다음날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8일 뒤 김재규 부장의 권총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발사됐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도대체 왜 죽였을까? 독재 치부 폭로로 ‘눈엣가시’
20일뒤 ‘궁정동 총성’ 역설적 지난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는 왜 ‘망명객’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을 죽여야만 했을까? 그 답은 아마도 “독재권력의 어두운 실체를 너무 많이 알았던 탓”이었을 듯싶다. 김 전 부장은 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중령 신분으로 참여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뒤, 63년 7월 중정 부장에 임명돼 3선 개헌 공작을 주도하는 등 권력의 양지에서 전성기를 달렸다. 하지만 69년 10월 중정 부장에서 해임되면서 박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73년 대통령이 임명하던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 제외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그는 재산이 15만달러라고 주장했으나, 77년 미 하원 청문회 조사에선 1500만∼2000만달러의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에서 그는 대표적인 ‘반 박정희’ 인사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정일권·김종필·김동조·오치성씨 등 고위급 인사들을 잇따라 미국으로 보내 귀국을 종용했지만, 김 전 부장은 거부했다. 그는 급기야 77년 6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와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등을 통해 박 정권이 저지른 김대중 납치사건과 대미 공작활동 등을 폭로했다.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부장에 대한 회유가 실패하자, 같은 해 12월 그를 겨냥한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김 전 부장이 박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 출간을 추진하면서, 박 전 대통령과의 틈은 돌이킬 수없는 상태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78년 12월 윤일균 당시 중정 해외담당 차장을 직접 보내 50만달러를 주고 원고를 사들였지만, 회고록은 79년 4월 일본에서 출간됐다. 그 뒤 박 전 대통령은 극도의 분노와 배신감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김 전 부장은 79년 10월7일 홀로 프랑스 파리로 향했고, 김재규 중정 부장의 지시로 쳐진 ‘덫’에 빠져들었다. 이로부터 채 20일이 지나지 않은 10월26일, 김재규 중정 부장이 서울 궁정동 중정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해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것은 너무나도 역설적이다. 정재권 기자 jjk@hani.co.kr
어떻게 조사했나? 이상열등 33명 면담 3만쪽 자료분석
지휘조 진술이 '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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