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련수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레지스탕스 시인, 민족시인, 제2의 윤동주… 하지만 사후 55년만에야 유족에 의해 다량의 유고(遺稿)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심련수는 알려지기 시작했다. 심련수 시인이 유가족과 연변의 지성인들에 의해 발굴된지 10여년 그 조명작업은 그냥 이어지고 있다. 8월 7일 한국 강릉 생가터에 심련수 흉상이 경립되고 8일 “2009 심련수 문학제”가 강릉에서 열리고 12일, 제9차 심련수 학술세미나가 중국 연길시에서 열리는 등 다채로운 학술, 문화행사가 이어지고있다.
필자는 몇해전 당시 룡정시 길흥촌 8대에 거취하고있던 심련수시인의 동생 심호수씨를 여러번 만나 가족의 증언으로 심련수시인에 대한 취재를 한적 있다. 오늘 유관자료와 가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심련수의 생애를 정리하여 다시 게재함으로써 새롭게 불붙고있는 심련수 조명작업에 보탬이 고자 한다. - 편집자
청송(靑松) 심련수는 1918년 5월 20일 조선 강원도 강릉군 난곡리 삼척 심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심운택(沈雲澤)과 어머니 최정배씨 사이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여났다. 심련수의 할아버지 심대규(沈大奎)는 강릉일대에서 인금높은 유학자였다. 삼촌 심우택은 홍범도 등과 어울려 반일활동에 나섰던 인물이였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심씨 가족은 어려운 소작인의 삶을 살고있었다. 자투라기 땅은 척박하여 소작료를 물고 나면 일곱 식구가 먹을 식량이 부족한 형편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모와 모친은 밤낮으로 길쌈을 하였다. 이 같은 현실 상황에서 조부는1925년 가족을 이끌고 로씨야 울라지보스토크로 이했다.
당시 동행한 심련수 시인의 삼촌 沈友澤은 그 곳에서 반일 단체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1년 로씨야 정부는 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집행하면서 조선인들을 먼 내지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 강경책에 의해 심씨 일가는 9,18사건을 전후하여 중국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 공제촌(共濟村)으로 이주하였다.당시 신안진에는 2만여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농업전문학교까지 있었다. 그후 일제는 집단부락을 시행하면서 공제촌을 6부락으로 개칭하였다. 심련수는 2년 반 남짓 신안진에 체류하는 기간 당시 북만지구 조선인협회 회장이며 항일투사로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김수산(金洙山)의 문하생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일면을 교육받았다. 그후 심씨 일가는 다시 길림성 룡정시(당시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 경화촌 길안툰)으로 옮겨 정착했다.
룡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소학교를 다닌 심련수는 1937년에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40년12월 6일에 졸업하였다. 이 시기 문학에서 그 재능을 보여 문예반장으로 활동하면서 만선일보에 “대지의 봄”, “여창의 밤”등 5편의 시-소설을 게재했다. 동흥중학 재학시 학교 교무주임인 장하일(張河一)의 부인이며 "인간문제"를 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 강경애(姜敬愛)와 교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련수는“나는 문인이 부럽다. 문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랴.”라고 일기문에 적으면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소설과 시, 그리고 잡지와 영화를 무척 즐기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우고 열정을 다져 갔다. 졸업후 심련수의 집안은 무척 가난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심련수를 도일시켜 류학하게 했다. 부친 심운택은 굶어죽는한이 있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시키겠으니 걱정 말고 일본으로 가서 청운의 뜻을 펴라고 아들을 격려하였다. 동생들도 자기네가 뒤를 섬길테니 꼭 일본으로 류학을 가라고 형님의 등을 떠밀었다. 가족의 사랑을 안고 심련수는 1941년에 일본 류학의 길에 올라 일본대학 예술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되였다. 1943년 심련수는 서둘러 룡정으로 귀향했다. 원래는 3년제였던 예술대를 전쟁시국때문에 2년 6개월만에 졸업한것이였다.
그때 일본학도병징병이 터지자 몸을 피해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을 지내던 시기 학생들에게 반일사상을 깨우쳐준것이 죄가 되여 두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1945년2월, 고향에 돌아와 백보배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돌아갔다. 몇달후 일본 패망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다섯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도보로 룡정으로 돌아가다8월 8일 왕청현汪淸縣) 춘양역(春陽鎭)역에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으로 피살되여 비극적 생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일곱이였다. 비보를 접한 심련수의 아버지가 달구지를 몰고 현장에 이르니 아들은 트렁크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트렁크를 시체와 같이 싣고 와 트렁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고한다.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있던 트렁크에서 발견된것들이라고 한다. 1946년 3월, 시인의 시신이 수습되여 룡정에 매장되였다. 그가 시인 윤동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걸출한 민족작가인 사실이 알려지기 까지 역사는 반세기를 넘게 기다려야 했다. 고인이 영면한지 55년이 지난 2000년에야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항아리 속에 간직해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던 고인의 유작을 공개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심씨 가족은 일본특무 가정으로 치부되여 큰 곤혹을 치르기도했지만 심호수는 반란파들에게 물매를 당하면서도 비닐에 꽁꽁싸서 항아리속에 넣은후 땅속 깊이 파묻은 형님의 귀중한 옥고를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 어렵사리 보존해온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력사적 격변과 부담감이 주는 충격을 미학적인 위안으로 치유해”낸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이였던것이다. 오늘날 연변과 한국의 학계는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와 같은 반렬에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연변에서는 “심련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불붙기 시작했다. 심련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작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그의 시편들에는 일제치하의 설음,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력력하게 드러나고있다 남다르다고 할만큼 강렬한 민족정신을 가진 심련수였기에 당시 민족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조선말 작품을 발행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그의 저항성은 시와 일기 곳곳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해방)을 기다리는 의지를 은유했으며 “고집”에서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메스를 가하기도 했다. “룡정이 낳은 또 한명의 시인 심련수, 그의 이름과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주옥같은 시편들은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것”(연변 학계)인바 그의 작품들은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한국 (중앙대 리명재교수)으로서 “그 시대 민족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되고있으며,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관동대 엄창섭교수)는평을 받고있다. 우리 말 글사용을 금지당하고 친일문학가가 득세하는 등 일제암흑기 우리민족의 문학상황은 그동안 “문학의 공백기”로 남아있기에 한국 학계에서는 심련수의 뒤늦은 등장은 1941~1945년 한국문학사의 암흑기를 규명하는 키가 될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있다. 또 당시 룡정을 중심으로 지금의 연변지역에서 조선족문학연구의 밑그림을 그리는 기초 작업으로도 될것이며 중국조선족의 위용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는 계기가 될것이다. 조선족문학 내지 한국문학사에 있어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확인되기에 충분한 물적 사료가 확보되여뒤늦게 실체를 드러낸 심련수, 27년의 짧은 생애를 초 쟏르적으로 활동하며 민족혼을 불사른 심련수는 민족문단의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2009년 8월 7일 한국 강릉 난곡동 율곡병원 뒤 생가터에 심련수 시인의 흉상이 경립되였다. 부록: 심련수 시인의 가족관계를 보면- 심련수가 요절한뒤 얼마안되여 유복자 심상룡(相龍)이 태여났다. 심상룡은1966년 문화대혁명때 조선으로 이주, 현재 교포총국에서 중국 교포를 담당하고 있는것으로 전한다. 시인의 첫째 남동생 심학수(學洙)는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김일성의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해져 후에 동서지간이 되였으며 큰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고 막내동생 해수(海洙)는 해방후 연변에서 문인으로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때 일본학도병징병이 터지자 몸을 피해 흑룡강성 영안현, 신안진, 진성, 강남촌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신안진 진성국민학교에서 교도주임 겸 6학년 담임교원을 지내던 시기 학생들에게 반일사상을 깨우쳐준것이 죄가 되여 두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1945년2월, 고향에 돌아와 백보배라는 22세의 처녀와 결혼한 뒤 다시 신안진으로 돌아갔다. 몇달후 일본 패망직전의 혼란기를 틈타 다섯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도보로 룡정으로 돌아가다8월 8일 왕청현汪淸縣) 춘양역(春陽鎭)역에서 일본군의 불신 검문으로 피살되여 비극적 생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일곱이였다. 비보를 접한 심련수의 아버지가 달구지를 몰고 현장에 이르니 아들은 트렁크고리를 잡은채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그 트렁크를 시체와 같이 싣고 와 트렁크를 열어보니 그속에는 일기책과 시, 편지들도 가득했다고한다. 현재 전해지는 원고는 대부분 그때 그가 들고있던 트렁크에서 발견된것들이라고 한다. 1946년 3월, 시인의 시신이 수습되여 룡정에 매장되였다. 그가 시인 윤동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걸출한 민족작가인 사실이 알려지기 까지 역사는 반세기를 넘게 기다려야 했다. 고인이 영면한지 55년이 지난 2000년에야 그의 동생 심호수씨가 항아리 속에 간직해 땅속에 파묻어 보관했던 고인의 유작을 공개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심씨 가족은 일본특무 가정으로 치부되여 큰 곤혹을 치르기도했지만 심호수는 반란파들에게 물매를 당하면서도 비닐에 꽁꽁싸서 항아리속에 넣은후 땅속 깊이 파묻은 형님의 귀중한 옥고를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 어렵사리 보존해온 그의 작품이 비로소 연변 사회과학원의 “문학과 예술” 잡지에 실리자 학계는 흥분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력사적 격변과 부담감이 주는 충격을 미학적인 위안으로 치유해”낸 그의 글들은 가히 “저항문학”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사건이였던것이다. 오늘날 연변과 한국의 학계는 그를 동시대를 호흡한 윤동주와 같은 반렬에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연변에서는 “심련수 문학작품연구소”가 세워져 그의 작품 전반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불붙기 시작했다. 심련수의 유작은 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평론 등 312편에 이른다. 이밖에 그가 창작 공부를 위해 베껴 쓴 창작노트 1권, 미술 습작을 한 노트가 더 있다. 편지 200여통과 일기, 기행문도 남아 일제 당시 생활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심련수는 동흥중학시절부터 시를 썼다. 그의 시편들에는 일제치하의 설음, 민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력력하게 드러나고있다 남다르다고 할만큼 강렬한 민족정신을 가진 심련수였기에 당시 민족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조선말 작품을 발행하기 어려운 시대였음에도 그의 저항성은 시와 일기 곳곳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시 “소년아 봄은 오려니”에서 좌절과 어둠 속에서도 봄(해방)을 기다리는 의지를 은유했으며 “고집”에서는 친일파들의 아부에 메스를 가하기도 했다. “룡정이 낳은 또 한명의 시인 심련수, 그의 이름과 청춘의 뜨거운 피로 쓴 주옥같은 시편들은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을것”(연변 학계)인바 그의 작품들은 “미학적 특성과 문학사적 의미에서 분석할때 실로 식민지시대 항일문학의 전형”한국 (중앙대 리명재교수)으로서 “그 시대 민족이 품고 있던 본원적인 기대와 갈망, 고향에 대한 자연회귀의식 등 다양한 정서가 표출”되고있으며, “일제 강점기 그만의 빛나는 서정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관동대 엄창섭교수)는평을 받고있다. 우리 말 글사용을 금지당하고 친일문학가가 득세하는 등 일제암흑기 우리민족의 문학상황은 그동안 “문학의 공백기”로 남아있기에 한국 학계에서는 심련수의 뒤늦은 등장은 1941~1945년 한국문학사의 암흑기를 규명하는 키가 될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있다. 또 당시 룡정을 중심으로 지금의 연변지역에서 조선족문학연구의 밑그림을 그리는 기초 작업으로도 될것이며 중국조선족의 위용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는 계기가 될것이다. 조선족문학 내지 한국문학사에 있어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확인되기에 충분한 물적 사료가 확보되여뒤늦게 실체를 드러낸 심련수, 27년의 짧은 생애를 초 쟏르적으로 활동하며 민족혼을 불사른 심련수는 민족문단의 하나의 큰 별로 빛날것이다. 2009년 8월 7일 한국 강릉 난곡동 율곡병원 뒤 생가터에 심련수 시인의 흉상이 경립되였다. 부록: 심련수 시인의 가족관계를 보면- 심련수가 요절한뒤 얼마안되여 유복자 심상룡(相龍)이 태여났다. 심상룡은1966년 문화대혁명때 조선으로 이주, 현재 교포총국에서 중국 교포를 담당하고 있는것으로 전한다. 시인의 첫째 남동생 심학수(學洙)는 흑룡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김일성의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해져 후에 동서지간이 되였으며 큰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고 막내동생 해수(海洙)는 해방후 연변에서 문인으로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을 지내기도 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