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학의 개념 중에 '구원의 동심원 모형'이라는게 있다. 개인이 경제적,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얻는 순서를 원형의 모델로 정식화한 것이다.
원의 한 가운데에는 물론 개인이 존재한다. 자기 문제는 일단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적 위험의 원인이 개인에게만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좀 더 큰 원들이 개인의 영역을 둘러싸고 있다. 가족->친척->친구나 동료->종교단체-> 지역사회->국가 순으로 점점 더 큰 원이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접근성과 개인이 기댈 수 있는 정도에 따른 구분이다.
중요한 건 '국가'의 존재인데, 19세기까지만 해도 '국가'는 개인의 개별적 위험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위험에 처할 때 개인들은 대체로 스스로의 자구노력과 동시에 '우리'의 영역에 속한 개인이나 기구에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이들은 전혀 모르는 '남'의 자선을 구걸할 수 밖에 없다.
이로부터 유추해보면 이기적인 개인의 생존본능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그 다음이 '우리'의 이익이며 마지막이 '남'의 이익이다. 자신에게 더 안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에게 반대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문제는 개인과 '우리'의 영역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유대가 무너지고 있는 반면 현대 사회복지에서 핵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는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회복지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 한 한국에서는 문제가 심각하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지만, 개인들이 '나'의 이익만 생각하고 '우리'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회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이익도 생각하지 않는 개인들이 인권과 같은 기본적 가치까지 포함한 '남'의 이익에 신경쓸리 만무하다. 그러니, 자기네 사무실이 '침탈'당할 때는 천막을 치고 격렬히 싸우던 공무원노조도 같이 일하던 비정규직 수백명이 잘려나가는데는 성명서 한 장 이상의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특권의 성채를 구축하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세력은 '구원의 동심원'을 왜곡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종된 사회는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진보의 과제는 위축된 '국가'의 역할을 복원함과 동시에 좌우의 엄호를 받는 기득권 세력 -재벌, 정규직 노조 등-의 특권을 해체하는 일이다. 눈 앞에 보이는 이해관계자들 간의 대립과 투쟁을 넘어 진정한 '우리'의 이익을 복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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