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는 2시였다. 20여분쯤 앞두고 기자실에서 법정에 올라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뒷자리 선배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했대.” 순간 기자실이 웅성거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심정지’라는 한줄짜리 기사가 보였다. ‘진짜일까….’ 심난한 마음으로 서울중앙지법 5층에 있는 법정으로 향했다. 피고인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2시가 되자 판사들이 들어왔다. 재판장은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방송이 합리적 과세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장기간 과세관청과 협의하고 외부 전문기관에 자문을 의뢰한 점 등을 보면 조정안에 합리성이 결여됐다고 보기 어렵고…정 전 사장이 독단적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다각적 검토 노력을 거쳐 조정안 수용을 결정했다고 봐야 한다.…사적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무리하게 조정을 밀어붙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무죄였다.
나는 정 전 사장을 만나본 적이 없다. 김 전 대통령도 만나본 적이 없다. 정 전 사장이 <한겨레>에 있었던 것은 내가 그 곳에 입사하기 한참 전 일이었다. 그냥 낯선 이였다. 김 전 대통령이 현 대통령일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관심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었다. 물어보고 싶었다. 법원을 통해 조정안을 받아들인 것이 개인의 이득을 위해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취한 행동이라며 지난해 8월 검찰에 의해 기소됐을 때 어땠는지. 기소되기 9일 전 대통령이 본인에 대한 해임안에 사인했을 때 어땠는지. 남북관계가 갈수록 악화일로인 상황을 보면 어떤지. ‘반쪽을 잃은 것 같다’고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하지 못하게 됐을 때 어땠는지. 그냥 물어보고 싶었다.
선고를 듣고 기자실에 돌아왔다. 방송사들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뉴스를 만들어 내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표한 연설이 된 지난 6.15 기념 연설이 나왔다.
“저는 지금 우리 국민이 걱정하는,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서 쟁취한 10년간의 민주주의가 위태롭지 않느냐 하는 것을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제가 피맺힌 심정으로 말씀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그걸 안하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이고, 독재자에 고개를 숙이고 그쪽에서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기사를 써야 했다. “‘방송 장악을 위한 권력의 청부 수사’ 논란 속에 기소된 정연주(63) 전 <한국방송> 사장에게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어 재판부가 정 전 사장이 무죄라며 든 10가지 이유 중 몇 가지를 뽑아 정리했다. 지면엔 다른 기사도 잡혀 있었다. 오전 10시에 있었던 선고에 대한 기사였다. 한국전쟁 때 군, 경에 의해 집단학살됐던 울산 보도연맹사건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심 재판부가 1심과 달리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한 내용이었다. “사건 발생 이후 독재정권의 은폐로 희생자 명단조차 받지 못해와 소멸시효 완성 전에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는 원고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썼다. 기자실에 틀어진 텔레비전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속보와 그의 삶을 정리한 기획 꼭지를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기사를 쓰는 내내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이 귀에 맴돌았다. 80년이 넘는 일평생 독재정권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이의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건 너무도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감을 했다. 하루가 저물었다.
기사를 쓰는 내내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이 귀에 맴돌았다. 80년이 넘는 일평생 독재정권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이의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건 너무도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감을 했다. 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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