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열린 재심 재판에서 2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당사자 송기복(맨 오른쪽)씨 등이 변론을 맡은 법무법인 지평지성의 서울 남대문로 사무실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송기복씨의 외삼촌 한용수씨, 동생 송기홍씨와 육촌 송기준씨.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1982년 송씨일가 간첩사건 무죄 판결
송기준(81)씨는 남색 모자를 벗어 손에 꼭 쥐었다. ‘무죄’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육촌 누이동생 송기복(67)씨는 선고가 끝났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손으로 가슴을 쳤다.
1982년 월북자를 가족으로 둔 송씨 일가 친·인척 28명에게 간첩 누명을 들씌운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해 국가가 27년 만에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사건 조작을 인정한 순간이었다.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송기복씨는 1982년 3월2일 학교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연행됐다. “친정아버지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며 그를 데려간 요원들은 ‘북한에 다녀온 것을 불라’며 때리기 시작했다. 116일 동안 불법구금된 그는 결국 “다녀왔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음료대리점을 하던 송기준씨는 육촌동생 송기복씨가 끌려가고 닷새 뒤 눈이 가린 채 지프에 태워졌다. “20년간 간첩으로 활동한 사실을 말하라”고 윽박지르며 정강이를 걷어차던 수사관들은 그를 거꾸로 매달고 얼굴에 물을 들이부었다. 결국 “인천 만석동 부두에서 공작선을 타고 북에 갔다 왔다”는, ‘없는 과거’를 지어낸 뒤에야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송씨 일가 28명은 이렇게 해서 간첩이 됐다. 이들은 한국전쟁 때 월북한 송기복씨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도, 안기부는 이들이 그와 여러 차례 만나고 간첩 활동에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1957~77년 사이 ‘송씨가 충청 지역에 지하당을 건설한다’는 뜻으로 ‘송충건’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가 남파됐다는 한 전향 간첩의 진술이 이들을 전대미문의 가족간첩단으로 만든 단서가 됐다.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12명 중 송기준씨에게 사형, 송기복씨에게 징역 10년 등을 선고했다. “송기준씨는 입북했었다고 지목된 시기에 이틀 이상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고 증언한 음료대리점 경리 사원은 위증 혐의로 구속됐다. 대법원은 “핵심 증거인 자백에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지만, 서울고법은 유죄를 선고했다. 1984년 대법원이 다시 파기환송을 했는데도 서울고법은 거듭 유죄를 선고했고, 세번째 상고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조병현)는 28일 열린 재심 재판에서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유일한 증거인 자백의 임의성을 의심할 사유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앞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는 당시 안기부가 무죄 판결을 한 대법원 판사들을 미행하고 유죄 판결을 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조사 내용을 공개하며 이 사건을 ‘반인권적 간첩조작 사건’으로 규정한 바 있다.
재판부는 “분단국가에서 월북자 가족이 겪은 숙명이라고 하기엔 고통이 너무 컸다”며 “지난 27년간의 고통을 이번 판결로 보상받을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위로가 돼 조국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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