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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어둠,그 너머를 향해 으랏차차

등록 2005-05-27 19:11수정 2005-05-27 19:11

 유도 경기에서 아쉽게 패한 시각장애인 권태홍군이 27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종합운동장 유도경기장에서 자신의 경기가 끝난 뒤 다른 선수들의 경기에서 들리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
유도 경기에서 아쉽게 패한 시각장애인 권태홍군이 27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종합운동장 유도경기장에서 자신의 경기가 끝난 뒤 다른 선수들의 경기에서 들리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
제1회 '전국시각장애인 체육대회' 투혼 불사르는 18살 권태홍군

소매를 바투 잡은 상대 선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옷깃이 목을 졸랐다. 굵은 땀 한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귓가를 맴돌던 경기장 주변의 응원 소리가 아득해졌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바르르 떨리는 상대 선수의 다리 근육이 전해져 왔다. ‘안다리다!’ 순간 권태홍(18·대전맹학교3)군의 왼쪽 다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되치기에 들어갔다. 심판의 팔이 옆으로 힘차게 뻗었다. ‘절반’이었다.

27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종합운동장 유도장. 초여름 같은 날씨에 더해 파란색과 흰색 도복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장내에 가득했다. “120번 절반!” 심판이 다시 한번 채점석을 향해 외쳤다. 그제야 등번호 120번을 단 권군과 그를 응원하던 같은 맹학교 친구들은 권군이 절반을 따냈다는 것을 알았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힘에 밀리며 경기 시작과 함께 유효를 빼앗겼던 권군은 순간적인 되치기 기술로 절반을 만회하며 앞서갔다. 경기는 더욱 치열해졌다. 연속적인 다리기술을 주고받더니 중심을 잃었다 싶으면 업어치기 같은 큰 기술이 어김없이 들어갔다. 도복 소매에 붙어 있는 빨간색 표지만 아니라면 이 경기가 시각장애인 유도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권군은 효과와 유효를 잇달아 빼앗기더니 결국 누르기 한판으로 지고 말았다. 3분50초. 짧지 않은 경기시간이었다. “저 선수 겁나게 힘세네!” 거친 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온 권군이 던진 첫마디였다. 분한 기색은 없었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권군은 26일부터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주최로 열리는 제1회 전국시각장애인 체육대제전에 참가하고 있다. 윤종능(53) 대전맹학교 체육담당 교사는 “상대 선수가 사회인 선수라 실력이 대단하다”며 “대진운도 나빴지만 어제 육상 경기 때문에 힘이 빠진 것 같다”고 패인을 진단했다.

60㎏급에 출전한 권군은 하루 앞서 열린 육상트랙 100m와 200m 경기에서는 연거푸 금메달을 땄다. 시각장애인 육상선수들은 코스를 알려주는 도우미의 팔짱을 끼거나 끈을 잡고 뛴다. 100m 기록은 13초51. 웬만한 비장애인도 당해낼 수 없는 스피드다. 200m 경기에선 도우미로 나선 비장애인이 결승선을 앞두고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기록은 29초23이 나왔다.


권군은 최근에 열린 전국장애인체전에서도 육상 2관왕에 올랐지만 그래도 유도가 더 좋다고 한다. “아직은 서툰데다 주기술도 없어요. 하지만 동작이 큰 업어치기 기술을 좋아합니다. 시원하잖아요? 그런데 시합 때는 잘 안먹히네요.”

약시로 태어나 중1때 완전히 '갇혀' 작년 3월부터 유도· 달리기 뛰어들어
100미터 13초51... '이원희선수와 붙고 싶여

선천성 약시로 태어난 권군은 서서히 시력을 잃더니 중학교 1학년 때 완전한 어둠에 갇혔다. 비장애인학교에서 맹학교로 옮겨야 했다. “초등학교 때도 눈이 나빠 체육시간에는 언제나 교실에 혼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시력을 잃은 뒤에야 운동을 시작한 셈이죠.” 권군은 지난해 3월부터 유도와 달리기에 뛰어들었다. 육상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지만, 입문한 지 2개월여 만에 나간 유도대회에서 3년 먼저 유도를 배운 학교 선배를 밭다리 한판승으로 이기며 우승을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달리기도 좋습니다. 하지만 앞에 무엇이 있는지, 결승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도는 달라요. 상대 선수와 몸을 부대끼며 땀과 거친 숨소리를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직 우리나라에 시각장애인 유도선수는 많지 않다. 전국체전에 참가하는 선수도 40명을 넘지 않는다. 대전맹학교에도 유도선수는 단 6명뿐이다. 권군의 목표는 내년 아시아경기대회 대표선발전에 나갈 정도의 실력을 쌓는 것. 매일 아침 1시간씩 연습을 하지만 이렇다 할 ‘상대’가 없어 아쉬운 점이 많다. “비장애인 유도선수와 연습을 할 수 있다면 기술이나 경기운영 등에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습니다.”

권군은 유도선수 가운데 ‘한판승의 마술사’ 이원희 선수를 좋아한다. “맞붙었다간 여지없이 깨지겠죠? 그래도 한번은 경기를 해보고 싶네요.” 의정부/글·사진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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