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지하벙커에서 관계자들이 경제위기 대책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숙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후에 미네르바의 구속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고, 승용차 홀짝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승용차 홀짝제의 효율을 추정한 자료에 따르면 국가 에너지 소비량 중에서 승용차의 비중은 5% 안팎이고, 그 가운데에 홀짝제 대상 차주의 비중은 3% 정도가 되므로 대상 차량이 모두 참여하였을 때 에너지 절약 정도는 0.075% 안팎으로 미미하다는 비판적 기사가 있었다. 혹자가 “그게 어디냐”며 절약 정신과 시책에 부응하는 애국심을 발휘할지도 모르나 자가용 차량에 길들여진 현대 도시인의 불편함은 만만찮은 것이다. 걷거나 몇 번 갈아 타야하고,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를 내려주거나 출장이라도 가야하는 날은 직장 울타리 밖에 차를 주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지위 높은 관료들이 짧고 화려한 임기 동안 지하철이나 버스, 혹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범을 공공연히 실천하므로 평생을 두고 밥벌이를 해야 하는 하위직 공무원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를 골목 어디에 세워두더라도 누가 간섭하지 않으니 그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하나마나한 정책을 비웃어 주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하급직의 비웃음이 사라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관료행정의 진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승용차요일제, 관료행정의 승리?
승용차요일제를 실시하는데, 신청 차에 전자테그를 부착하고 시내 주요 도로에 설치한 RFID리더기를 통해 요일제 준수여부를 확인하는 무선인식시스템이 도입된다고 한다. 주중 하루는 차를 몰지 않아야 하고, 위반이 연간 5회 이상 되면 안 된다고 한다. 어떤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왜 내 차를 내가 세금 내고 타는데 간섭하느냐?”했더니, 그 대답이 “자동차세 감면 혜택을 준다지 않느냐?” 하고 누가 응대했다. “그러면 나는 그 5% 감면 안 받고 안 하겠다.” 했더니 “공무원은 다 해야 된다 하지 않느냐?, 차라리 선생하지 말든지?”라고 하자 “신청하고 테그를 떼어서 집에 모셔두면 되겠네.” 했더니 “운행 기록이 없으면 점검을 요구한다지 않느냐, 훼손하면 안 된다지 않느냐” 하니 “헛 참, 고작 세금 몇 천 원 깎아주는 것으로 생색을 내다니.” 하는 대화가 농담으로 오고가는 것을 나는 들었다.
예전에 시행하던 홀짝제가 제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거나, 좀 더 강제할 만한 유인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마도 세재의 혜택 정도 되는 모양이다. 사실 이러한 관료 행정에는“교통체증 완화와 에너지 절약, 자동차 배기가스 감소와 맑고 깨끗한 도시 환경 조성” 이라는 거창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가 따져 본 그 정책의 효율에 관한 것을 믿을 경우 그 조족지혈의 성과를 위해 들이는 공은 눈물겨운 것이다. 국가가 “맑고 깨끗한” 그 무엇의 가치를 진정으로 원하고 추구한다면 진정성 있게 다가서야 한다. 눈을 가리고 전시하기 위한 청계천의 방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꿈꾸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대화를 바라보는 나는 사실 착잡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이 승용차요일제에 참여하면서 나는 또 나약하게 권력과 전자테그로 무장한, 진화한 국가 관료행정에 굴복해야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에 의해서 이메일이 열려지듯이 별로 주목받을 필요도 없는 내 하루의 주행 동선이 일일이 감시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쾌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럴 때에 뜬금없이 스치는 것은, 우리 안의 불쾌를 허물어버리는 자발적인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비분(?)이다. 1주일에 한두 번 정도 조금 불편하겠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걸으면서 관료들이 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꿈꾸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에게 일상화되어 차를 가진 국민 모두가 차를 버리다시피 하고 매일 걸어 다니면 당황한 관료들이 또 뭐라 하겠는가. 경제를 살려야 하므로 전자테그 체크횟수가 많으면 엄청난 마일리지를 주겠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다시 우리들의 비웃음을 앗아가는 관료들을 비웃어 줄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평교사가 명퇴하면 교감? 정년을 채우지 않고 명퇴하는 선배 교사들이 있다. 퇴임식장에는 으레 “교사 ○○○”라 하지 않고 “교감 ○○○” 라 하는 문구가 걸린다. 나는 이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규정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에도 그렇게 걸렸기에 그러한 규정이 어디에 있느냐며 다시 질문했다. 교육공무원임용령 제15조 4항에 “명예퇴직하는 교육공무원”은 “승진임용하여야 한다”는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고 하였다. 정년퇴직을 하는 교사는 “교사”로서 퇴직하고 명퇴하는 교사는 “교감”으로 퇴직하게 되는 근거가 교육공무원임용령에 명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육 현장을 바라보는 상이한 스펙트럼도 확인하였다. 여기에는 좋은 의미로, 오랫동안 교직에 종사하였으나 그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퇴직하는 교사에 대한 나름의 예우가 담겨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 마지막을 “교감”으로 예우함으로써 노고를 치하하고 아쉬움을 위무하려는 의도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빚 좋은 개살구이며 당착이다. 왜냐하면 교감이 당연히 교사보다 직급이 높으므로 그 예우 면에서 교감이라 칭하면 당사자나 그 주위가 반길 것이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권력과 지위를 좇는 관료들의 기생적 사고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리하여 떠나는 이나 보내는 이가 모두 작별 앞에서 낯설어져 오래 부대끼었던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실 학교 현장을 들여다보면, 교사 중에서는 교감이나 교장, 혹은 교육전문직을 선호하는 교사가 더러 있다. 아니 상당하다고 해야 옳다. 그들은 특별히 업무 능력에서나 대인 관계에서 탁월한 성과와 성취를 보여주면서 주도면밀하게 점수를 관리한다. 대단할 것도 없는 입신출세를 위하여 기꺼이 필요한 경우에는 한 몸 아끼지 않으나 반드시 나서야 할 때는 몸을 사린다.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는다기보다는 상관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 험한 일을 자청하기보다는 점수되는 일에 열정을 바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라고 하면 무리가 생기고 그 정체가 모호하여 학교를 위한 교사가 되기를 자임한다. 그들에게 부장 교사나 교감은 교장이 되기 위한 단계로서 의의가 있다. 교감이 되고서도 교장이 되지 못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나이가 제한 받거나 특별한 사고를 내지 않는 교감은 교장이 된다. 그러므로 평생을 교직에 평교사로 있었던 사람을 별 볼 일 없었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적 오류를 갖게 된다. 지극히 무능하였거나 개인적 출세(?)와는 담을 쌓은 사람일 수 있다. 혹은 승진의 대열에서 탈락하여 좌절감으로 무사안일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반면에, 아이들과 평생을 뒹군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대부분 교감, 교장이 아니라 평교사들이다. 업무에 서툴렀거나 수업을 소홀하였거나 대인 관계가 무능했던 경우는 별로 없다. 사람 좋고 아이들에게 사랑받았던 교사는 대부분 평교사일 가능성이 많다. 겪어 온 나의 경험 일부이다. 명퇴 평교사에게 “교감”이라는 직함을, 그것도 명퇴하는 날 부여하여 그의 교직 마지막을 위무하려는 이러한 교육공무원임용령의 발상은 교육행정 관료가 교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교사보다는 교감이 우월하다는 탁상의 인식이며 교직의 보람을 승진이나 직책에 두고 있는 혐의가 짙다. 평교사를 우습게 여기는 태도도 포함하고 있다. 교직을 천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관용적 수식이다. 진심으로 아이를 가르치고 그들과 호흡하고 그들의 아픈 데를 만져주는 것이 교사라고 하면 교사가 무슨 노동자 쯤 된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반문을 한다. 어떻게 정년 때까지 분필을 들고 목 따갑게 아이들을 가르치겠느냐 하는, 수업에 관한 모종의 멸시적 태도가 그들에게 있다. 태만하며 무능한 교사를 길들이고 그들을 획일적으로 견인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의 즐거움을 모르며 아이들 속에서 웃고 웃을 줄을 모른다. 대부분의 관리자와 전문직에게는 아이들이 익명의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 몇 명이 어느 대학을 가고, 몇 명이 보충수업에 참여하고, 몇 명이 결석과 지각을 하고, 몇 명의 머리가 길어서 단속되었으며, 몇 명이 전학을 갔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면 교사가 교사 이상이기를 꿈꾸는 것은 승진과 명예에 걸쳐있는 가파른 포물선의 정점을 향한 것이다. 그들은 교사에게 교감이라는 수식을 한번 내리는 것이 성은이라 생각하며 그에 공감하는 교사를 상식적인 사람이라 믿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경향이 교육 관료들의 탓만은 아니다. 그들의 인식 저변을 형성하도록 고무하고 기여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직에 있는 교사들의 인식과 태도가 아닌가 한다. 무수한 예비 교감과 교장이 오로지 충성을 다하면서 달려오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만약 학교의 교사가 교감이나 교장, 혹은 교육의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의 직함과 출세 지향적 삶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면, 명퇴하는 평교사에게 “교감”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치욕적인 것으로 비춰질 것이므로 아예 성립될 수 없는 법령으로 사문화되고 말 것이다. 예우이기는커녕 그것이 수치심을 유발한다면 누가 그러한 직함의 가소로운 수식받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법령에 명시된 저 포장된 승진과 직함의 껍데기를 교직에 종사하는 자가 만지작거리는 한 법령은 유효하며 그 권능을 오래 행사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행정 관료들이 만든 법령의 명퇴교사 예우관련 조항은 일반 교사들의 알량한, 출세 지향적이고도 맹목적인 승진 욕구와 직함에 대한 집착에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평교사가 평교사이기를 거부하므로 관료는 얕잡아 보며 교사적 자존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 기생이 진화도 한다. 교원평가, 결과를 인사와 연계하지 않겠다? 얼마 전에 특정 교원단체장이 교원평가제를 “조건 없이 즉시 수용”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교과부와 합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공청회와 정책토론회가 요식 절차로 남았을 뿐 민주당이 조건 없이 등원하는 9월 정기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면 그야말로 교원평가제는 탄력을 받을지도 모른다. 백기를 들고 조건 없이 수용하는 자가 말하는 “사(私)교육 이기는 명품수업을 위해 교사 지원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뒷말은 공허한 사족이다. 또 교원평가제의 필요성을 두고 “친북좌파 교사, 성희롱하는 교사, 성적 조작하는 교사, 아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들과는 같이하고 싶지 않다. 이들이 우리 교직사회를 희화화시키는 적(敵) 아닌가. (평가를 통해) 거를 사람은 걸러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한 발언은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 학교와 교사를 잡동사니의 합숙소쯤으로 비하한 혐의가 있다. 교사는 매년 근무평가를 받았고, 성과금 지급을 위한 평가를 받았고, 다면평가를 받았다. 한 해에 세 번의 평가를 받아 왔다. 지금까지 우리 교직이 하나마나한 평가를 통해서 문제 있는 교사를 방치한 인사를 해 왔다는 당착에 빠지게도 된다. 평가결과를 인사와 연계하지는 않으면서 “3년 정도 제도를 시행해 보고 평가결과의 인사연계 여부를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한 말은 신뢰할 수도 없다. 나는 오히려 교원평가를 왜 인사와 연계하지 않으려는지 되묻고 싶다. 평가를 하면 그 결과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다시 하나마나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면서 교원평가제가 교직의 제 문제를 일소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그 내면은 교사에 대한 평가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이를테면 “교원평가제가 별 것 아니다. 혹은, 평가와 인사가 당연히 연계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해할지 모른다. 현재 오가는 이야기대로 추진되는 교원평가제는 악법이 될 가능성이 크며, 평가와 인사를 연계하는 것이 참으로 치졸한 발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 역시 조금 사족을 붙여 보고자 한다. 우리는 학교의 주인이 아이들(학생)이라고 당연히 말한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아이들의 학습과 성장을 위하여 학교라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교와 관련한 주체들, 이를테면 학생이나 교사나 학교의 관리자나 학부형이나 교육청의 관계자이거나 교과부 관료들 그 누구의 손을 잡고 물어보라. 정말 학교의 주인이 학생이라고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모두 입으로는 우리의 아이들을 말하지만 아이들은 학교의 주인이 아니다. 아이들은 다만 들러리일 뿐이며 소외 그 자체다. 교사는 학교에서 월급을 받아가며, 상당한 교사가 승진의 욕망으로 자기를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가끔 참으로 착하며 헌신적이어서 교사다운 교사가 있기는 하나 그들의 목소리는 학교의 구조 안에서는 변죽일 뿐이며, 다만 그가 그의 주위를 가꾸는 일로 반짝이고 있을 뿐임을 우리는 본다. 학교의 관리자 중에서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이 모두 개성을 가진 소중한 인격체라고 여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아이들은, 수 백 명이 입학하고 수 백 명이 졸업하면서 한 학급의 서른 몇 명이 한결 같은 교복을 입은 익명일 뿐이다. 아이들은 학교의 진학률이나 하찮은 선전을 위한 도구 정도로 인식된다. 가끔 예외적 관리자가 있으나 그들이 때 묻지 않은 영혼을 간수하는 일은 흔치가 않다. 시스템 안의 개인일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학교의 주인은 아이들이 아니다. 학교의 주인은 교사이며, 교장 교감이며, 교육청 전문직과 교과부 관료들이 그 상전이다. 이들은 모두 일용할 양식을 아이들로부터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지배하려 들고, 어떤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원평가제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전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도된 것을 되돌려 놓고 나서 교원평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 줄 서지 않는 교사 우선 아이들을 그 중심에 놓고 사고해야 한다. “평가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 무엇을 평가할 것인지, 평가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평가의 지도를 계획할 때에, 아이들을 어떻게 참여시킬지, 아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들을지 고려한 다음에 지도를 그려야한다. 지도의 축척과 기입할 기호와 색칠할 음영은 모두 아이들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 아이들로부터 인간적 불신을 받거나 아이들로부터 무능이라 인식되거나 아이들로부터 소외되는 교사는 그 자격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란 영악하고 철이 없어서 사람을 몰라본다거나 포퓰리즘에 물드는 대상으로 경계하기도 하나 그것은 진정으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기우이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나으며 그 눈은 맑다. 누가 진정으로 자기들을 위한 수업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마음을 열며, 사랑을 이야기하는지 아이들은 알고 있다. 아이들을 중심에 놓을 수 있다면 교육 현장의 모든 문제가 해소될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아이들을 배제한 교원평가제를 실시하려 한다면 그것은 악(惡)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의 교사 승진구조를 반드시 혁파해야 한다. 교사들은 대체로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 바른 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알면서 하지 않는다. 교감과 교장이 그들에 대한 평가권을 갖고 있기도 하며, 그 시선을 감당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과 교사적 유순함이 거기에 투영되어 있다. 양심과 교육적 철학을 상실하면 교사도 앵무새와 다르지 않다. 비겁해지고 두려움에 길들여진다. 더러는 늘어서서 줄을 선다. 그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린다. 그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지하철에서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르다. 스스로 아부하고 경쟁자를 폄하하며 그 몸짓을 과장하여 충성한다. 참으로 가소롭고 꼴불견의 자세로 읊조린다. 어떤 점에서는 대한민국의 학교가 교사의 승진을 위해 존재한다. 학교 안에는 학생이 몇 명 익명으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승진구조를 유지하면서 실시하는 (더군다나 공공연히 평가 결과와 인사를 연계하지 않겠다는 말은) 대국민 사기극일 가능성이 짙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교원평가제와 관련하여서도 교육행정 관료들은 지치지 않고 진화할 것이다. 진화한 다음 지금의 말들을 부정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진화 결과가 현행의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교원평가 결과와 인사를 연계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학교는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승진에 눈이 먼 자들, 아이들을 버린 자들이 평가의 잣대를 들고 그들끼리 연대하면서 학교를 유령처럼 배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가 나의 말에 의구심을 가진 눈빛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어찌 당신의 생각만 옳다고 이야기 하느냐, 좋은 교사도 많으니 걱정하지마시라’그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진화하는 관리직과 교육행정 관료들의 사악함을 이겨낼 만한 교사가 몇이나 될 지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관료들은 끊임없는 교원평가법 이야기 속에서 교감, 교장, 교육전문직, 교육관료들의 평가에 대한 것은 함구하고 있다. 교사평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중심에 아이(학생)를 놓고 그 아이들과 교감하는 교사를 고무하는 학교, 아이의 성장과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교사를 칭찬하는 학교, 약한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강한 아이를 더욱 북돋우는 교사를 발굴하는 학교, 아이의 고민으로 슬퍼하거나 아파하며 노력하는 교사를 알아보는 학교, 교감과 교장이 아침저녁 아이들의 눈빛을 살피며 그 이름을 불러주는 학교, 우리는 그런 학교를 꿈꾼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꿈을 실현할 수만 있다면 교원평가제이든, 교육행정관료들의 진화이든 두려운 것이 없을 것이다. 교사를 길들인다는 망상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학교들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예순의 평교사,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몇 해 전에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동창회를 했다. 선생님은 예순의 연세에 여전히 소읍 어느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을 한다고 하셨다. 사업하는 친구 한 명이 선생님을 자기도 모르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연발하면서 “그 연세에 그냥 선생님이시냐?”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동료들 거의가 교장이라고 하시면서 “시골 어른들이 세상 버리신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맏이인 선생님은 어른들을 두고 멀리 울릉도 같은 벽지 근무를 못하셨으니 당연히 승진을 못하셨겠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던지 불러서 옆자리에 앉게 하시고는,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 많지? 속상해야 선생이지.” 하는 말씀을 하셨다. 별로 속상해 보지 못한 나는 민망하였었다. 선생님은 그 연세에 미국 교육심리학자 브루너의 이야기까지 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옛날 우리들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들려주었던 삼국지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이야기의 기억이 새로웠었다. 선생님은 낡은 오토바이 한 대로 도시락을 사서 출퇴근 하였었다. 한번은 가을에, 아이들이 돌아가고 오후 늦게까지 햇볕 들던 교실에 남아 여학생들에게 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가르치셨다. 그 때의 그 풍금 소리가 창문너머의 노란 모과 빛보다도 더 고왔었다. 나는 동창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훌륭하신 선생님이 아직 평교사로 계시다는 것이 불만스러웠었다. 선생님의 고지식함과 강직한 성품 탓이려니 하면서 어쩌면 ‘높고, 외롭고, 쓸쓸’하였을 그 마음의 근처를 헤아려보기도 하였었다. 내가 계속 선생을 하며 늙어간다면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되어야겠다 다짐하기도 했었다. 내가 만일 교육 행정 관료들처럼 기생하거나 진화하는 부지런을 떨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옛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에게서 그 어떤 유전적인 것을 물려받고 싶다. 훗날 나를 만나고 간 아이들에게 높지는 못하였으나 외롭거나 쓸쓸하게 살았다며 기억된다면 교사로서 얼마나 큰 다행이겠는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평교사가 명퇴하면 교감? 정년을 채우지 않고 명퇴하는 선배 교사들이 있다. 퇴임식장에는 으레 “교사 ○○○”라 하지 않고 “교감 ○○○” 라 하는 문구가 걸린다. 나는 이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규정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에도 그렇게 걸렸기에 그러한 규정이 어디에 있느냐며 다시 질문했다. 교육공무원임용령 제15조 4항에 “명예퇴직하는 교육공무원”은 “승진임용하여야 한다”는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고 하였다. 정년퇴직을 하는 교사는 “교사”로서 퇴직하고 명퇴하는 교사는 “교감”으로 퇴직하게 되는 근거가 교육공무원임용령에 명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육 현장을 바라보는 상이한 스펙트럼도 확인하였다. 여기에는 좋은 의미로, 오랫동안 교직에 종사하였으나 그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퇴직하는 교사에 대한 나름의 예우가 담겨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 마지막을 “교감”으로 예우함으로써 노고를 치하하고 아쉬움을 위무하려는 의도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빚 좋은 개살구이며 당착이다. 왜냐하면 교감이 당연히 교사보다 직급이 높으므로 그 예우 면에서 교감이라 칭하면 당사자나 그 주위가 반길 것이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권력과 지위를 좇는 관료들의 기생적 사고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리하여 떠나는 이나 보내는 이가 모두 작별 앞에서 낯설어져 오래 부대끼었던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실 학교 현장을 들여다보면, 교사 중에서는 교감이나 교장, 혹은 교육전문직을 선호하는 교사가 더러 있다. 아니 상당하다고 해야 옳다. 그들은 특별히 업무 능력에서나 대인 관계에서 탁월한 성과와 성취를 보여주면서 주도면밀하게 점수를 관리한다. 대단할 것도 없는 입신출세를 위하여 기꺼이 필요한 경우에는 한 몸 아끼지 않으나 반드시 나서야 할 때는 몸을 사린다.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는다기보다는 상관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 험한 일을 자청하기보다는 점수되는 일에 열정을 바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라고 하면 무리가 생기고 그 정체가 모호하여 학교를 위한 교사가 되기를 자임한다. 그들에게 부장 교사나 교감은 교장이 되기 위한 단계로서 의의가 있다. 교감이 되고서도 교장이 되지 못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나이가 제한 받거나 특별한 사고를 내지 않는 교감은 교장이 된다. 그러므로 평생을 교직에 평교사로 있었던 사람을 별 볼 일 없었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적 오류를 갖게 된다. 지극히 무능하였거나 개인적 출세(?)와는 담을 쌓은 사람일 수 있다. 혹은 승진의 대열에서 탈락하여 좌절감으로 무사안일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반면에, 아이들과 평생을 뒹군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대부분 교감, 교장이 아니라 평교사들이다. 업무에 서툴렀거나 수업을 소홀하였거나 대인 관계가 무능했던 경우는 별로 없다. 사람 좋고 아이들에게 사랑받았던 교사는 대부분 평교사일 가능성이 많다. 겪어 온 나의 경험 일부이다. 명퇴 평교사에게 “교감”이라는 직함을, 그것도 명퇴하는 날 부여하여 그의 교직 마지막을 위무하려는 이러한 교육공무원임용령의 발상은 교육행정 관료가 교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교사보다는 교감이 우월하다는 탁상의 인식이며 교직의 보람을 승진이나 직책에 두고 있는 혐의가 짙다. 평교사를 우습게 여기는 태도도 포함하고 있다. 교직을 천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관용적 수식이다. 진심으로 아이를 가르치고 그들과 호흡하고 그들의 아픈 데를 만져주는 것이 교사라고 하면 교사가 무슨 노동자 쯤 된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반문을 한다. 어떻게 정년 때까지 분필을 들고 목 따갑게 아이들을 가르치겠느냐 하는, 수업에 관한 모종의 멸시적 태도가 그들에게 있다. 태만하며 무능한 교사를 길들이고 그들을 획일적으로 견인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의 즐거움을 모르며 아이들 속에서 웃고 웃을 줄을 모른다. 대부분의 관리자와 전문직에게는 아이들이 익명의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 몇 명이 어느 대학을 가고, 몇 명이 보충수업에 참여하고, 몇 명이 결석과 지각을 하고, 몇 명의 머리가 길어서 단속되었으며, 몇 명이 전학을 갔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면 교사가 교사 이상이기를 꿈꾸는 것은 승진과 명예에 걸쳐있는 가파른 포물선의 정점을 향한 것이다. 그들은 교사에게 교감이라는 수식을 한번 내리는 것이 성은이라 생각하며 그에 공감하는 교사를 상식적인 사람이라 믿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경향이 교육 관료들의 탓만은 아니다. 그들의 인식 저변을 형성하도록 고무하고 기여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직에 있는 교사들의 인식과 태도가 아닌가 한다. 무수한 예비 교감과 교장이 오로지 충성을 다하면서 달려오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만약 학교의 교사가 교감이나 교장, 혹은 교육의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의 직함과 출세 지향적 삶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면, 명퇴하는 평교사에게 “교감”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치욕적인 것으로 비춰질 것이므로 아예 성립될 수 없는 법령으로 사문화되고 말 것이다. 예우이기는커녕 그것이 수치심을 유발한다면 누가 그러한 직함의 가소로운 수식받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법령에 명시된 저 포장된 승진과 직함의 껍데기를 교직에 종사하는 자가 만지작거리는 한 법령은 유효하며 그 권능을 오래 행사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행정 관료들이 만든 법령의 명퇴교사 예우관련 조항은 일반 교사들의 알량한, 출세 지향적이고도 맹목적인 승진 욕구와 직함에 대한 집착에 기생하고 있는 셈이다. 평교사가 평교사이기를 거부하므로 관료는 얕잡아 보며 교사적 자존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 기생이 진화도 한다. 교원평가, 결과를 인사와 연계하지 않겠다? 얼마 전에 특정 교원단체장이 교원평가제를 “조건 없이 즉시 수용”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교과부와 합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공청회와 정책토론회가 요식 절차로 남았을 뿐 민주당이 조건 없이 등원하는 9월 정기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면 그야말로 교원평가제는 탄력을 받을지도 모른다. 백기를 들고 조건 없이 수용하는 자가 말하는 “사(私)교육 이기는 명품수업을 위해 교사 지원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뒷말은 공허한 사족이다. 또 교원평가제의 필요성을 두고 “친북좌파 교사, 성희롱하는 교사, 성적 조작하는 교사, 아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들과는 같이하고 싶지 않다. 이들이 우리 교직사회를 희화화시키는 적(敵) 아닌가. (평가를 통해) 거를 사람은 걸러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한 발언은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 학교와 교사를 잡동사니의 합숙소쯤으로 비하한 혐의가 있다. 교사는 매년 근무평가를 받았고, 성과금 지급을 위한 평가를 받았고, 다면평가를 받았다. 한 해에 세 번의 평가를 받아 왔다. 지금까지 우리 교직이 하나마나한 평가를 통해서 문제 있는 교사를 방치한 인사를 해 왔다는 당착에 빠지게도 된다. 평가결과를 인사와 연계하지는 않으면서 “3년 정도 제도를 시행해 보고 평가결과의 인사연계 여부를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한 말은 신뢰할 수도 없다. 나는 오히려 교원평가를 왜 인사와 연계하지 않으려는지 되묻고 싶다. 평가를 하면 그 결과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다시 하나마나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면서 교원평가제가 교직의 제 문제를 일소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그 내면은 교사에 대한 평가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이를테면 “교원평가제가 별 것 아니다. 혹은, 평가와 인사가 당연히 연계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해할지 모른다. 현재 오가는 이야기대로 추진되는 교원평가제는 악법이 될 가능성이 크며, 평가와 인사를 연계하는 것이 참으로 치졸한 발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 역시 조금 사족을 붙여 보고자 한다. 우리는 학교의 주인이 아이들(학생)이라고 당연히 말한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아이들의 학습과 성장을 위하여 학교라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교와 관련한 주체들, 이를테면 학생이나 교사나 학교의 관리자나 학부형이나 교육청의 관계자이거나 교과부 관료들 그 누구의 손을 잡고 물어보라. 정말 학교의 주인이 학생이라고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모두 입으로는 우리의 아이들을 말하지만 아이들은 학교의 주인이 아니다. 아이들은 다만 들러리일 뿐이며 소외 그 자체다. 교사는 학교에서 월급을 받아가며, 상당한 교사가 승진의 욕망으로 자기를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가끔 참으로 착하며 헌신적이어서 교사다운 교사가 있기는 하나 그들의 목소리는 학교의 구조 안에서는 변죽일 뿐이며, 다만 그가 그의 주위를 가꾸는 일로 반짝이고 있을 뿐임을 우리는 본다. 학교의 관리자 중에서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이 모두 개성을 가진 소중한 인격체라고 여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아이들은, 수 백 명이 입학하고 수 백 명이 졸업하면서 한 학급의 서른 몇 명이 한결 같은 교복을 입은 익명일 뿐이다. 아이들은 학교의 진학률이나 하찮은 선전을 위한 도구 정도로 인식된다. 가끔 예외적 관리자가 있으나 그들이 때 묻지 않은 영혼을 간수하는 일은 흔치가 않다. 시스템 안의 개인일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학교의 주인은 아이들이 아니다. 학교의 주인은 교사이며, 교장 교감이며, 교육청 전문직과 교과부 관료들이 그 상전이다. 이들은 모두 일용할 양식을 아이들로부터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지배하려 들고, 어떤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원평가제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전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도된 것을 되돌려 놓고 나서 교원평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 줄 서지 않는 교사 우선 아이들을 그 중심에 놓고 사고해야 한다. “평가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 무엇을 평가할 것인지, 평가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평가의 지도를 계획할 때에, 아이들을 어떻게 참여시킬지, 아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들을지 고려한 다음에 지도를 그려야한다. 지도의 축척과 기입할 기호와 색칠할 음영은 모두 아이들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 아이들로부터 인간적 불신을 받거나 아이들로부터 무능이라 인식되거나 아이들로부터 소외되는 교사는 그 자격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란 영악하고 철이 없어서 사람을 몰라본다거나 포퓰리즘에 물드는 대상으로 경계하기도 하나 그것은 진정으로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기우이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나으며 그 눈은 맑다. 누가 진정으로 자기들을 위한 수업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마음을 열며, 사랑을 이야기하는지 아이들은 알고 있다. 아이들을 중심에 놓을 수 있다면 교육 현장의 모든 문제가 해소될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아이들을 배제한 교원평가제를 실시하려 한다면 그것은 악(惡)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의 교사 승진구조를 반드시 혁파해야 한다. 교사들은 대체로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 바른 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알면서 하지 않는다. 교감과 교장이 그들에 대한 평가권을 갖고 있기도 하며, 그 시선을 감당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과 교사적 유순함이 거기에 투영되어 있다. 양심과 교육적 철학을 상실하면 교사도 앵무새와 다르지 않다. 비겁해지고 두려움에 길들여진다. 더러는 늘어서서 줄을 선다. 그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린다. 그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지하철에서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르다. 스스로 아부하고 경쟁자를 폄하하며 그 몸짓을 과장하여 충성한다. 참으로 가소롭고 꼴불견의 자세로 읊조린다. 어떤 점에서는 대한민국의 학교가 교사의 승진을 위해 존재한다. 학교 안에는 학생이 몇 명 익명으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승진구조를 유지하면서 실시하는 (더군다나 공공연히 평가 결과와 인사를 연계하지 않겠다는 말은) 대국민 사기극일 가능성이 짙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교원평가제와 관련하여서도 교육행정 관료들은 지치지 않고 진화할 것이다. 진화한 다음 지금의 말들을 부정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진화 결과가 현행의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교원평가 결과와 인사를 연계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학교는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승진에 눈이 먼 자들, 아이들을 버린 자들이 평가의 잣대를 들고 그들끼리 연대하면서 학교를 유령처럼 배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가 나의 말에 의구심을 가진 눈빛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어찌 당신의 생각만 옳다고 이야기 하느냐, 좋은 교사도 많으니 걱정하지마시라’그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진화하는 관리직과 교육행정 관료들의 사악함을 이겨낼 만한 교사가 몇이나 될 지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관료들은 끊임없는 교원평가법 이야기 속에서 교감, 교장, 교육전문직, 교육관료들의 평가에 대한 것은 함구하고 있다. 교사평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중심에 아이(학생)를 놓고 그 아이들과 교감하는 교사를 고무하는 학교, 아이의 성장과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교사를 칭찬하는 학교, 약한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강한 아이를 더욱 북돋우는 교사를 발굴하는 학교, 아이의 고민으로 슬퍼하거나 아파하며 노력하는 교사를 알아보는 학교, 교감과 교장이 아침저녁 아이들의 눈빛을 살피며 그 이름을 불러주는 학교, 우리는 그런 학교를 꿈꾼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꿈을 실현할 수만 있다면 교원평가제이든, 교육행정관료들의 진화이든 두려운 것이 없을 것이다. 교사를 길들인다는 망상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학교들이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예순의 평교사,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몇 해 전에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동창회를 했다. 선생님은 예순의 연세에 여전히 소읍 어느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을 한다고 하셨다. 사업하는 친구 한 명이 선생님을 자기도 모르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실수를 연발하면서 “그 연세에 그냥 선생님이시냐?”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동료들 거의가 교장이라고 하시면서 “시골 어른들이 세상 버리신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맏이인 선생님은 어른들을 두고 멀리 울릉도 같은 벽지 근무를 못하셨으니 당연히 승진을 못하셨겠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던지 불러서 옆자리에 앉게 하시고는,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 많지? 속상해야 선생이지.” 하는 말씀을 하셨다. 별로 속상해 보지 못한 나는 민망하였었다. 선생님은 그 연세에 미국 교육심리학자 브루너의 이야기까지 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옛날 우리들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들려주었던 삼국지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이야기의 기억이 새로웠었다. 선생님은 낡은 오토바이 한 대로 도시락을 사서 출퇴근 하였었다. 한번은 가을에, 아이들이 돌아가고 오후 늦게까지 햇볕 들던 교실에 남아 여학생들에게 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가르치셨다. 그 때의 그 풍금 소리가 창문너머의 노란 모과 빛보다도 더 고왔었다. 나는 동창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훌륭하신 선생님이 아직 평교사로 계시다는 것이 불만스러웠었다. 선생님의 고지식함과 강직한 성품 탓이려니 하면서 어쩌면 ‘높고, 외롭고, 쓸쓸’하였을 그 마음의 근처를 헤아려보기도 하였었다. 내가 계속 선생을 하며 늙어간다면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되어야겠다 다짐하기도 했었다. 내가 만일 교육 행정 관료들처럼 기생하거나 진화하는 부지런을 떨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옛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에게서 그 어떤 유전적인 것을 물려받고 싶다. 훗날 나를 만나고 간 아이들에게 높지는 못하였으나 외롭거나 쓸쓸하게 살았다며 기억된다면 교사로서 얼마나 큰 다행이겠는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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