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노사 임금 협상 일지
현실성 없는 임금삭감 요구 내세워 압박
은행들 ‘아침 노사합의…저녁 취소’ 파행
은행들 ‘아침 노사합의…저녁 취소’ 파행
금융권 임금협상이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아침에 노사 합의를 발표했다가 당일 저녁 취소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이미 합의한 사업장에서도 사용자 쪽이 이를 파기할지 여부를 가늠하고 있다. 금융권 고임금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등에 업은 정부가 노사 협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탓이다. 정부의 무리한 개입에 사용자 쪽도 난감해 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기존 직원 임금 5% 반납 등에 노조의 동의를 얻었던 이종휘 우리은행장은 이 합의를 스스로 깰지 여부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공적자금을 받은 은행으로서 금융권 임금 감축을 솔선수범했다는 자긍심은 빚 바랜 지 오래다. 노조 때문이 아니다. 청와대에서 강하게 질책한 사실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 노사 합의는 올 연말까지 기존 직원 임금 5% 반납, 신입 사원 초임 20% 삭감 등이 핵심이다. 하지만 청와대 요구수준은 이보다 높았다. 지난 1월1일부터 현재까지 받은 임금도 소급적용해 모두 5%이상을 반납하거나, 합의 체결시점으로부터 향후 1년간 임금 5%이상을 반납하라는 게 청와대 주문 사항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요구는 우리은행만이 아닌 은행권과 금융공기업 전체를 겨냥한다. 지난달 31일 신용보증기금이 당일 아침엔 우리은행과 같은 수준으로 노사 합의를 했다가, 당일 저녁 이를 취소한 해프닝이 발생한 것도 바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금융권 사용자들의 교섭권을 위임받은 신동규 은행연합회장도 진퇴양난에 빠졌다. 지난달 20일 산별 교섭을 중단하는 대신 지부별 교섭 선언을 통한 임협 타결이라는 전략에 큰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국민은행, 하나은행 순으로 지부 차원에서 노사 간 합의가 발표될 예정이었다”면서 “하지만 비에이치(BH·청와대)의 새로운 요구 때문에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정부 요구를 충족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일단 임금 소급 반납은 설령 노사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법적 구속력이 없다. 박문순 노무사(민주노총 노동법률센터)는 “이미 지급된 임금의 소유권은 개별 직원에게 있기 때문에 노사 합의 사항이 아니다”면서 “직원 개개인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은행연합회도 법률 검토 결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합의 체결 시점을 기준으로 향후 1년간 임금 반납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노조 쪽에 내년 임단협 교섭권까지 내놓으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노사 교섭 담당자는 “비에이치가 금융권 임협을 직접 챙기는 상황이어서 우리(금융권 사용자)의 운신 폭이 좁다”며 “그러나 정부 요구 자체가 현실적으로 관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당분간 파행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금융권 사용자들은 추석 상여금과 연말 성과급 삭감을 검토 중이다. 오치화 금융노조 홍보부장은 “청와대는 노사 교섭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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