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인 어르준(36)
이주노동자 귀국 정착 돕는 네팔인 어르준
네팔인 어르준(36·사진)은 매일 새벽 5시 인터넷 메신저에 로그인을 하면서 일과를 시작한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작은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어, 한국시간으로 오전 9시에 맞추려면 현지에선 이맘때 일을 시작해야 한다. 네팔은 한국보다 3시간15분이 늦다. 네팔로 여행 오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직접 가이드로 나서기도 하는데, 한국 관광객들은 그의 말솜씨에 배꼽을 잡고 넘어간다. “이거 보면 환장해요.” “이 옷 색깔 잘 빠졌네.” 지난 3일 <한겨레>와 만난 어르준은 말투부터 ‘완전 한국인’이었다. 10년만에 ‘빈손 귀국’ 경험살려 창업 교육
이주생활 지원 ‘아시아 인권포럼’도 만들어 그는 한국에서 10년간 일했던 이주노동자 출신이다. 1994년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던 그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자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택했다. 브로커에게 220만원을 주고 15일짜리 관광 비자를 얻어 건너왔다. 10년간을 불법체류자로 경기 의정부, 충남 천안, 전북 익산 등을 돌아다니며 플라스틱 공장, 만두 공장, 전구 공장 등지에서 일했다. 처음에는 3~4년만 일하고 돌아오려 했으나 귀국길은 10년이나 걸렸다. 브로커에게 진 빚을 갚고 나서도 월급의 절반을 고국의 부모에게 보내고 나면 돈이 모이지 않았다. 외환위기 때는 밀린 월급 700만원을 떼이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어르준은 동료 노동자들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섰다. 2000년부터 3년 동안 이주노동자 모임 ‘네팔공동체’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집회에 참석했다. 2003년 박찬욱씨 등 감독 6명이 함께 만든 인권영화 <여섯 개의 시선>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2003년, 어르준은 갑자기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집회에 많이 나가 얼굴이 알려진 상태에서 곧 한국 정부에 붙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붙잡혀 추방되면 다시 한국에 오기 힘들 것 같아 제 발로 돌아왔죠.” 고국에 돌아올 땐 빈손이었다. 게다가 네팔에서는 한국에서 배운 기술을 써먹을 곳이 없었다. 옆나라 인도에 건너가 한국인 상대로 가이드 생활을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2005년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여행사를 차렸다. 한국에서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여행 업무는 물론이고, 방송 촬영 지원, 통·번역 일을 도맡는다. 최근엔 카트만두 시내 타멜 거리에 이주노동자 출신 대여섯명을 모아 한국 식당도 같이 차렸다. 어르준은 여행사를 차린 2005년에 ‘아시아 인권문화개발 포럼’이라는 시민단체도 만들었다. 한국으로 떠나는 네팔인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돕기 위한 단체다. 지금은 네팔 전국에 16개 지부까지 뒀다. 예비 이주노동자들에겐 한국어, 한국 노동법 등을 강의하고, 한국에서 네팔로 돌아온 사람들에겐 창업, 취업 교육을 한다. “몇몇 네팔인들이 한국에서 배운 기술과 인맥을 갖고 돌아와 무역, 농장 일 등을 하면서 성공한 사례도 있어요. 저는 돌아온 네팔인들이 방황하지 않고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마련하는 게 꿈이에요.” 어르준은 “귀환한 이주노동자들을 모아 ‘이주노동자 네트워크’를 만들어 네팔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카트만두/글·사진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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