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자 경향신문에 난 '고려대 청소용역 아주머니들의 폐지 전쟁'이란 기사를 봤다. 황당하고 빈정 상하는 한편, 기자 표현 그대로 '벼룩의 간을 내먹는' 시설관리업체에도 화가 났지만 고려대에 더 화가 났다. 등록금 동결로 고작 비용절감하는 대상이 여파가 뻔히 어디로 튈지 뻔한 청소용역 같은 시설관리업체 쪽이라니, 한국 지성의 산실이라는 대학이 하는 짓이 한국 대기업들이 하청업체 등골 빼서 흑자 내는 도덕성 수준과 뭐가 다른지 헛갈린다.
결연후원금 모집일을 하다보니 후원 진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회복지기관에서 받은 추천서를 들고 후원대상자 방문을 하거나 기존에 후원받는 대상자를 방문할 때가 있다. 돌아다니면서 제일 가슴 아픈 경우는 열심히 일하는데도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맞닥드릴 때다. 가령 장애아 출산 후 떠나버린 남편을 대신해서 야구르트 배달을 하며 중증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사는 어머니를 볼 때, 이혼하고 가출했거나 일찍 죽은 자녀를 대신해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공공근로까지 다니며 손주들을 돌보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만날 때면, 돌아나오면서 마음 한켠이 묵직해진다.
이런 사연으로 내가 알게된 차상위계층의 꽤 많은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청소나 가사도우미, 간병일처럼 꼭 해야 하는 일인데 사회가 멋대로 저임금으로 만들어놓은 일에 종사하고 있고, 그들의 대부분이 폐지를 집에 챙겨와 현관 안팎에 쌓아둔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부부를 대신해 중고생 손자를 키우시던 일흔여덟의 김복순 할머니는 틀니가 없어 음식도 못씹는 형편인데도 작년 내내 큰손자의 대학입학금을 마련한다며 집안팎 가득 폐지를 쌓으시며 살았고, 관절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평생 일만 해도 가난했던 박정례 할머니는 느즉막히 얻은 뇌성마비 장애 딸을 돌보느라 인근 빌딩에 청소용역일을 다니며 폐지를 모아 품을 팔았다.
갑자기 기사를 읽는데 혈압이 올랐다. '뺏을 걸 뺏어라...해도 너무 하네..'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으로 스르륵 흘러나왔다. 모든 용역일을 하시는 분들의 삶이 내가 아는 분들처럼 이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겠지만, 많지 않은 급여를 받으면서 새벽부터 나와 호락호락하지 않은 노동을 취미생활로 하고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한국 사회는 그네들의 노동력을 소위 '부가가치' 운운하며 저임금 노동으로 전락시켰지만 실상 누가, 어떤 노동이 더 가치있는 노동인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육체노동 시장의 저임금은 한국사회의 편견이 낳은 왜곡된 구조일뿐 그네들의 노동의 가치가 아니다. 그러잖아도 이런 것을 알고나서부터는 고용환경이 그나마 나은 편인 회사 청소용역 아줌마들만 봐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이런 뉴스를 보고있노라면 그런 아주머니들이 받는 임금의 최소한 몇배는 받아가면서 고작 경비 절감으로 시설관리업체 비용이나 깎고앉았을 시설 고용주 책임자들의 낯짝이 궁금하다.
그래...폐지에 이름이 써있는 것은 아니다. 업무장소에서 수거해오는 것이니 회사 이익으로 돌리라는 요구, 원칙적으로만 따져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원칙을 잘 따지기 앞서서 청소용역 아주머니들의 수고 대비 그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돌아봐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황당한 사건이나 상황을 접할 때면 '신문에 날 만한 일이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신문은 그렇게 매일 아침, 끊임없이 사람들의 안방으로 사무실로 각종 사건사고들을 빼곡하게 실어온다. 그렇다고 황당하고 억울한 사건들이 신문에 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황당한 사건들은, 사람이 죽거나 재물적 손상이 심각하지 않는 한 '팔릴만한' 뉴스인지 아닌지의 심사를 먼저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신문도 많고 사건도 많지만, 신문마다 다루는 사건이 다르고 같은 사건이지만 다르게 다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신문의 뉴스와 논조를 구독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독자 취향이 신문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 이 기사를 이 정도 크기로 실어준 곳은 경향 정도인 것 같다. 새삼 경향 칭찬을 하려고 쓴 글도 아니고, 경향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방금전 언급한 것과 같이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은 신문들의 상업성과 얍쌉함을 탓하지만, 신문들이 비춰줘야 할 어려운 곳을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는 것은 신문의 저급함이 아니라 신문을 선택하고 읽어줬던 바로 우리들의 비겁함과 저급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다른 곳도 아닌 대학안에서 버젓히 벌어지는지, 이런 일은 많아도 이런 뉴스는 왜 접하기가 어려운지 탓하기 앞서, 우리가 편안하고 쾌적하게 일하는 업무환경이나 기업의 이윤에는 매일같이 새벽부터 밤까지 나와 100만원도 안되는 임금을 받는 이들의 희생 역시 묻어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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