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감옥에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 처형실, 하얼빈 의거 5개월 뒤인 1910년 3월26일 안 의사가 “동양평화 만세”를 마지막으로 외치고 순국한 이곳에 전시된 나무 의자와 올무, 교수대에 올랐던 7개의 계단이 당시 상황을 전해준다. 나중에 감옥 세탁장으로 사용되다 복원된 이곳에는 그의 유언과 중국인들의 안 의사 추모글들도 전시돼 있다. 박민희 기자
사형 집행된 뤼순감옥서 다시본 안중근
옥중 ‘동양평화론’ 집필…“EU보다 앞선 지역공동체”
“자객 아닌 의병 참모중장으로 이토 저격한 것이다”
옥중 ‘동양평화론’ 집필…“EU보다 앞선 지역공동체”
“자객 아닌 의병 참모중장으로 이토 저격한 것이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구 한복판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203 풍경구’가 있다. 뤼순 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인 이곳은 1905년 러일전쟁 최고의 격전지였던 ‘203고지’다. 일본군은 여기서 1만8000명의 목숨을 잃는 대가를 치른 끝에 승리했고 결국 조선을 차지했다. 1909년 10월20일, 메이지 정권의 초대 내각총리와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는 이 203고지에 올라 “오랜만에 듣는 203고지/1만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오늘 올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라는 시를 남겼다.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이토는 며칠 뒤 만주를 넘보고 대륙 진출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했고,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 3발을 맞고 숨졌다.
203고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본 관동도독부의 뤼순감옥과 뤼순재판소가 남아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줄 때 동양의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은 조선 의병참모장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한 뒤 갇혀 있다가 순국한 곳이다. 침략과 평화,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이토와 안중근의 상반된 이상은 하얼빈과 뤼순에서 그렇게 충돌했다.
지난 20일 찾아간 20여만평 규모의 거대한 뤼순감옥은 을씨년스러웠다. 안 의사는 이토를 사살한 뒤 하얼빈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고 1909년 11월3일 뤼순감옥으로 압송됐다. 40년 동안 만주를 통치한 일본이 수많은 항일독립투사들을 감금, 고문하고 사형시키던 곳, 한켠에 안 의사가 5개월 동안 갇혀 있던 독방 벽돌건물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안중근은 다음해 3월26일 사형당할 때까지 자서전 <안응칠역사>과 <동양평화론>을 써내려갔다. 사형 집행이 앞당겨져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본문 4부분중 첫 부분인 전감만 쓰인 미완성 유고로 남았지만, 안 의사는 이를 통해 항일 독립투사를 넘어선 국제 평화주의자로서 시대를 뛰어넘은 유산을 남겼다.
유고와 재판과정에서 남겨진 심문조서, 법정진술에서 안중근은 서양제국주의, 특히 러시아의 침략주의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한중일의 연대를 주장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의 침략주의를 저지하고 동아시아의 평등한 발전을 구상했다. 안중근은 일본 점령하의 뤼순을 중국에 돌려주고,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여 그곳에 한·중·일이 공동 참가하는 동양평화회의를 설치할 것, 3국의 공동평화군 창설, 공동 경제개발, 공동개발은행 설립, 공동화폐 발행 등을 주장했다.
서명훈 하얼빈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은 “안중근은 투사가 아닌 선구자”라며 “그의 동양평화론에 나타난 민족자결, 자주, 독립, 사상은 윌슨의 민족자결론보다도 선구적이었고, 지역공동체 구상은 유럽연합(EU)보다도 훨씬 앞섰다. 이제서야 동아시아공동체가 논의되고 있고 안중근 의사가 소망했던 조국의 모습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현실에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다시 살피고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텅비어 있는 뤼순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법정은 100년 전 안중근을 보기 위해 몰려든 300여명의 방청객과 기자들로 가득찼던 현장이다. 일본 내각은 이미 1909년 7월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여기에 방해되는 것을 신속히 없애려 했다. 재판소 안 전시실에는 1909년 12월2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가 안의사를 극형에 처하도록 관동도독부 법원에 지시한 공문과 이에 대해 고등법원장이 지시대로 사형에 처하겠다고 회답한 서류가 붙어 있어, 당시의 불공정한 재판을 증언한다.
이미 사형 판결을 내리기로 정해진 재판은 1910년 2월7일부터 14일까지 6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재판에서 안중근은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저격한 것이지 자객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라며 “포로를 처벌하려거든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해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토의 죄상을 낱낱히 지적했다. 당시 영국 신문 <더 그래픽>의 찰스 모리머 기자는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는 소식을 전세계로 전했다. 글·사진 뤼순(다롄)/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뤼순감옥 한켠 안중근 의사가 144일간 수감돼 있던 독방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던 책상과 붓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지금은 텅비어 있는 뤼순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법정은 100년 전 안중근을 보기 위해 몰려든 300여명의 방청객과 기자들로 가득찼던 현장이다. 일본 내각은 이미 1909년 7월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여기에 방해되는 것을 신속히 없애려 했다. 재판소 안 전시실에는 1909년 12월2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가 안의사를 극형에 처하도록 관동도독부 법원에 지시한 공문과 이에 대해 고등법원장이 지시대로 사형에 처하겠다고 회답한 서류가 붙어 있어, 당시의 불공정한 재판을 증언한다.
이미 사형 판결을 내리기로 정해진 재판은 1910년 2월7일부터 14일까지 6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재판에서 안중근은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저격한 것이지 자객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라며 “포로를 처벌하려거든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해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토의 죄상을 낱낱히 지적했다. 당시 영국 신문 <더 그래픽>의 찰스 모리머 기자는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는 소식을 전세계로 전했다. 글·사진 뤼순(다롄)/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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