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우리는 훌륭하지 못하다.

등록 2009-11-13 15:58

10년 조금 전이었다. 졸업반 아이는 가출을 했다.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다. 울먹일 뿐 아이의 행방을 몰랐다. 아이가 가출하게 된 동기를 물었으나 아이를 가르쳐 온 내가 모르는 것처럼 자식을 키운 그도 모르는 눈치였다. 찾아야 하는 아이를 수소문을 하였다. 아이들이 들락거리는 채팅방 어디에서 보았다는 옆 반 친구를 용케 만났다. 연락이 닿아 그 아이를 만났다.

말을 않고 화난 것처럼 나를 경계하였다. 어쩌랴, 아이의 고집은 꽤 오래 걸렸다. 아이가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였다. 가출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실직하여 막노동을 전전하며 술에 의지하여 가장의 체통을 간신히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문제는 아버지의 과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술 마시고 귀가하여 아이를 구타하였다. 심한 것이었다. 만취한 아버지는 자는 아이도 깨워서 때리고, 친구 집으로 피신해 있는 아이를 불러서 때렸다. 놀이터에서 배회할 때도 어김없이 찾아 때렸다. 아이는 그래서 숨은 것이었다. 다시 그 지옥 같은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버티었다. 아이는 이야기하는 동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지 입술과 손을 떨었다. 그래서 죽고 싶다고도 하였다.

내가 그래서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이야기를 더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동네 목욕탕에서 때를 민다고 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동네 목욕탕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했다. 아이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때를 민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친구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이 앞에서 웃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에 관한 아이의 부끄러운 인식을 이르집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 하였다. 다만 알았다고 하고 더 들어주었다.

나는 아이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서툰 나의 위로가 상심한 아이에게 가 닿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아이에게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였고,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상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염(殮)장이(납관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였었다. 죽은 자를 씻기고 마지막 가는 얼굴에 화장을 해 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내가 아이의 생각에 어떤 재단(裁斷)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 나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술 취하여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했다. 다 큰 자식이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그 어머니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아이는 며칠 지나 학교에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니고 추워져서 방학을 했다. 졸업하기 전에 잠깐 만난 아이는 방학 때 친척의 간판 가게에서 일을 했다 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었다며 자랑했다. 기특하다 하고 헤어졌다. 1년 쯤 더 지난 뒤에 아이는 해병대 머리를 하고, 발목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군화를 신고 나타났었다. 군에 가 있는 동안 나를 생각했다고 했다. 나는 별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그러한 말을 듣는 것이 무안하였다. 아이는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마울 것이 없는 나는 오히려 고마웠다.

아이가 잠시 앉아서 나에게 던져두고 간 말은 아직 가르침에 관해 모르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었다. 가출해 있을 때 자기를 만나 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아니, 아이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준 것에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에게 맞아 본 이후로,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일한 이후로 한 번도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못하였다고도 했다. 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었을 때, 들어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 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나는 고마울 것 없는 나의 이야기가 고맙게 된 사연을 더 들을 수 있었다.

군에 가서 사람들을 사귀었는데, 외롭기도 하여서 아버지의 이야기며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자기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이 모두 공감해 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도 자기의 이야기 못지않은 다른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그 용기를 갖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최초의 이야기를 나에게 던졌을 때 벽 없이 들어주었던 것에 고마워한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하였으나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첫 휴가 일부를 함께한 것이 고마웠다.


나는 나를 스쳐 간 이 아이의 언어를 오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의 과장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전에 메일로 배달 온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일백예순여덟번째 “위로”(http://blog.naver.com/mindprism/80087383063)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고 흔들었다. “… 아기의 이름을 말하면서 엄마는 아기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분명하게 느끼면서 또렷한 슬픔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아기가 세상에서 한 ‘존재’로서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상대방에게 내 슬픔의 실체 그대로가 전달되고 흡수되었다는 느낌이 들면 모든 위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또 충분합니다. …” 나는 내가 들었던 오래 전 아이의 언어가 슬픔의 표현이었으며, 다만 듣고 있었던 나의 보잘 것 없는 행위의 일부가 그 슬픔의 전달이며 흡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고마워했던 아이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기사 “10대 죽음 내몬 각서교육”(한겨레신문 11월 11일치)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이야기다. 0교시 보충수업에 5분 지각하였다는 이유로(물론 누적된 것이었을 수 있다.) 자퇴할 것을 서약하는 각서를 작성하도록 한 것이, 피어나지 못한 10대의 아파트 옥상 투신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연이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학교를 두려워 한 아이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있겠으나, 아이의 어리석음이 목숨을 끊었으니 그 어리석음으로 어린 죽음이 변명되어질 수는 없다. 잘못은 아이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학교가 왜 있으며, 교사는 또 왜 있으며, 0교시 수업은 또 왜 있는지를 묻게 된다. 이 물음이 누구의 탓인가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야만적인 말들을 쏟아 놓아야 한다. 서로의 무죄에 대하여 지루하게 변명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간명한 답이 있다. 이렇게 물으면 된다. “두발규정이 좋은지, 학생은 영원히 철없는 주변인인지, 체벌은 진정한 반성에 이르게 하는지, 학교에서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 우리가 송 군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학교 문화의 “반성적 성찰”에 관한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구제불능의, 나쁜 어른일 뿐이다.

길버트 하이트는 「가르침의 예술」에서 훌륭한 교사의 덕목으로 “자애로움”을 말하면서 이렇게 갈파한다. “모든 배움터에서 학생들이 다음과 같이 느낄 필요가 있다. ‘교사는 우리를 돕고 싶어 하고, 우리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우리의 성장에 관심이 있고,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는 슬퍼하고 우리가 이룬 성공에 대해서는 기뻐하며,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가진다.’뭔가 가치 있는 것을 배우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통스러워하기까지 한다. 피곤하기도 하다. 훌륭한 교사의 자애로움만이 그 일의 어려움, 고통, 피로를 덜어준다.”

우리는 훌륭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죄 지를 때가 많다. 그것은 무지한 데서 비롯되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목숨 버릴 만큼의 중대한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무능과 어리석음은 끝이 없다. 우리들의 한계가 고스란히 아이들의 고통이 된다. 수능을 치고 나서 아이들이 활짝 웃지 않더라도 친구와 부모와 선생과 세상이 꼭 껴안아 주었으면 한다. 모두가 아이의 슬픔이 전달되고 흡수되는 스펀지가 되었으면 한다. 규정과 제도와 편견의 벽이 스펀지 뒤에 숨어서 일순간 무력해질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어른인 우리는 정말 훌륭하지 못할 때가 많다. 어른들 마음대로인 세상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