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타작을 했다. 검정콩 타작을 했다. 아버지의 도리깨는 가볍고 야물었다. 대나무 작대기에 구멍을 내어 꼭지를 꿰고 도리깨 열은 닥나무 한 줄, 고무 호스 두 줄로 탄력을 높인 것이었다. 손재주가 있는 아랫마을 친구 분의 작품이었다.
도리깨질을 하기 전에 나는 질문을 했다. 왜 멀쩡한 콩 탈곡기를 두고 힘들여 도리깨질을 하려느냐고. 아버지의 말씀은 간단하였다. 메주콩이나 논두렁콩은 콩 섶이 순하지마는 검정콩은 나무의 가지 같아서 기계의 도리깨 날이 망가진다고 하였다. 불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이만한 일에 불만하면 도시 업자들이 또 다른 기계를 생산하고, 또 그것을 구입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도리 없이 종일 도리깨질을 해야 했다.
아버지의 검정콩은 너마지기 논에 꽂은 대추나무 사이에 듬성듬성 뿌려둔 것을 거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가뭄에 대추나무가 말라가는 시늉을 하여 물을 두어 번 퍼 올렸더니, 목말랐을 콩도 그 은혜를 입고 성장하여 꼬투리가 제대로 맺었다고 한다. 꺾어 말려 둔 지가 이십여 일이 되어서 마를 대로 말라 있었다. 파란 비닐을 깔고 콩 섶을 늘고 두드렸다. 세게 칠 필요가 없었다. 도리깨의 힘이 꼬투리를 터뜨릴 정도만 내리치면 검정콩은 쏟아졌다. 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으나 아버지의 힘 조절을 보면서 금방 배웠다. 세게 치면 콩이 멀리 달아나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콩 섶을 한 번 뒤집어 다시 치기를 반복하고 납작해진 섶을 걷어내고 다시 말려 쌓아 둔 콩 섶을 깔고 도리깨질과 뒤집기와 걷어내기를 반복하였다. 한나절 했더니 땀이 났다. 잠시 쉬면서 닦았다. 초겨울의 들에서 땀 닦아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담배를 문 아버지가 대추밭을 보면서 괜히 심었다고 하였다. 모종을 얻어 논에 나무를 심었으나, 이른 봄에 잎이 날 때부터 순을 치고 약을 해야 하니, 일하는 것에 비해서 소득이 없다고 했다. 한때 대추 금이 좋아서 너도나도 심는 바람에 버리지도 못한 대추나무에 달린 것을 가을이 되면 소득 없지만 결실할 뿐이었다. 차라리 콩을 심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말끝을 흐리셨다.
점심때가 되어 가져 온 밥을 먹었다. 어머닌 배추쌈과 무생채를 하고 된장을 끓이고 고등어를 구워오셨다. 들에서 밥을 먹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때 시골에서는 모내기나 가을철 타작 무렵에 들에서 밥먹는 풍경은 흔한 것이었다. 그때는 삼촌들과 동네 사람들이 이웃해 일을 했으니 사람들도 많았었다. 늦은 저녁에 멍석을 펴고 가마솥에서 퍼온 양푼 밥을 먹곤 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오래 나에게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해는 지지 않았으나 뒷산 높은 산간 마을은 그늘이 일찍 들었다. 여전히 강에 선 갯버들 세 그루가 서리를 맞고 잎이 말라가고 있었다. 기슭의 갈대가 긴 머리 날리면서 또 강물이 흐르듯 11월의 바람을 맞고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르면 흔적 없이 모두 사라지고 이파리들이 마저 떨어지겠지만, 그 잎은 잎의 일생을 그렇게 살면서 또 보는 이를 쓰다듬어 줄 것이다. 또 다른 잎이, 또 다른 시간에 또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쓸어 줄 것이다. 강 너머의 산에는 붉은 단풍이 쇠해가고 있었다.
대충 정리해서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거둔 검정콩은 열 말 정도 되었다. 콩 한 되에 만 이천 원 정도를 하니 아버진 백여 만 원 검정콩 돈을 살 것이다. 일 년을 공들인 것 치고는 하찮은 것이다. 내가 보충수업으로 한 달여 교실에 들락거리면서 버는 돈에 비할 것이 아니나 아버지의 노동에는 그 대가가 턱없다.
아버지가 소를 먹여보겠다고 몇 번 나에게 상의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재정적 후원자가 아니나 아버진 당신의 하고자 하는 일을 타진해 오셨다. 나는 그때마다 나는 이 연세에 무슨 소를 먹이냐며 응대하지를 않았었다. 소 몇 백 마리를 키우는 처남을 둔 아버진 자식인 내가 그거 좋겠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시작해 볼 생각이 있는듯하였으나 나의 무관심에 낙담하였는지, 이제 그 말씀도 없으시다. 대추를 따서 말리고, 감을 따서 서울로 보내 팔고, 여름 가운데에 고추를 따서 또 말리는 일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의 전부다. 고구마를 심고 배추 무를 심고 부추와 상추와 자잘한 채소를 기르는 일은 아버지의 일상이다. 그 흔해빠진 일 속에서 아버지는 늙어 가신다.
일전에 시골집의 마루에 날아다니는 파리에 놀라서 호들갑떠는 집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그러셨다. “파리는 저그들대로 논다. 신경 쓰지 마라.” 또 일전에 쌀 직불금을 부당하게 받았다는 관료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도 돈 아쉬울 때가 없겠나?” 그러셨다. 아버지는 세상을 사시면서 나에게 어떤 안분지족을 말씀하신 적은 없으나 큰 욕심 내지 않고 살아오셨다. 그러므로 나는 몇 번 더 아버지와 함께 두드릴 가을 저문 들에서의 콩 타작 도리깨질을 꿈꿀 수 있다. 가볍고 야문 아버지의 도리깨로 검은콩 타작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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