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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총련 선전 믿다가 반세기 생이별 동해 마주한채 ‘또다른 이산 고통’

등록 2009-12-13 19:53수정 2009-12-13 23:03

재일동포 북송사업 50년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가슴앓이

14일은 일본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1959년 12월14일 975명의 재일동포가 ‘귀국선’을 탄 것을 시작으로 1984년까지 9만3340명(일본인 처 등 일본인 6000여명 포함)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50년 세월 동안 북송 재일동포 가족들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말 못할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이산가족의 비극을 재일동포 사회로까지 연장한 북송사업 실태를 당사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일본 도쿄에 사는 탈북 재일동포 이상봉(64·가명·작은사진 왼쪽)씨는 매달 13만엔의 생활보호금을 받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매달 1만엔씩을 모은다. 집세 5만엔과 휴대전화비, 전기·수도세 등을 제외하면 4만엔 정도밖에 남지 않지만 생활비를 아껴 지금까지 20만엔을 모았다. 북한에 남겨둔 부인과 아들, 딸을 위해서다. 지난 11일 도쿄도 외곽도시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난 이씨는 “언젠가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이 돈을 전달해 살 길을 마련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는 북에 두고온 가족들과의 재회를 기약할 수 없다. 북한을 등지고 나온 탈북자 신세이기 때문이다. 주름투성이 얼굴에다 무언가 걱정스러운 듯한 조심스런 말투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북송사업 이산가족의 비극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1960년 4월. 16살이었던 이씨는 부모, 형제 3명 등 가족 5명과 함께 니가타항에서 만경봉호를 탔다. ‘귀국’ 당시 환갑을 넘긴 아버지는 오사카에서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자식들의 학비는커녕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재일동포 가정 중에도 가장 힘든 축에 속했다.

떠난 자

일본에 남은 형님 송금 덕택
90년대 식량위기 견뎌
사상자유 박탈에 홀로 탈출
“북에 두고온 가족 생각하면…”

남은 자

가족 11명 한꺼번에 ‘귀국선’
가난한 살림에 송금 압박
부모님 장례식도 참석 못해
“죄송스런 마음 한으로 남아


왼쪽부터 재일동포 이상봉(64·가명), 전문자(69)씨.
왼쪽부터 재일동포 이상봉(64·가명), 전문자(69)씨.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간부들이 와 조국에 돌아가면 대학도 무료고, 직업선택의 자유도 있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총련은 상황이 제일 어려운 동포가정부터 방문했다.”

이씨는 귀국 두달이 지난 즈음 오사카에 홀로 남은 형에게 편지를 부쳤다. 편지지에는 ‘조국에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고 썼지만 우표 뒤에는 ‘총련의 선전은 거짓말이다. 귀국하지 말라’고 북한의 실상을 전했다. 형이 귀국선을 타기 전에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결국 편지를 받고 귀국을 포기한 형은 북에 있는 가족들의 버팀목이 됐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북에서 광부, 농사, 기계설계 일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던 이씨는 건설일을 하던 형님의 송금 덕분에 아사자가 속출하던 1990년대에서도 살아남았다.

“송금이 허용된 1970년 이후 나는 형님 덕분에 살았다. 형님이 토목업체 사장으로 자리를 잡은 이후 매달 100만엔씩 보내주었다. 모두 합치면 일본 돈으로 9천만엔은 될 것이다. 30%가량은 당국에 뜯겼지만 그 돈으로 중고자동차 파는 일을 하면서 형편이 나아졌다.”

이씨는 북한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먹고사는 일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가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말실수를 해서 당국에 네번이나 끌려갔다. 특히 2001~2005년 먼저 탈북한 세 동생의 가족들을 도와주지 않았느냐며 심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뿌리째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내가 이중삼중의 얼굴을 가지지 못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2006년 8월 결국 이씨는 탈북을 감행했다. 일본을 떠난 지 46년만이었다. 중국으로 탈북한 이씨는 심양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2007년 2월 일본에 다시 돌아왔다. 이씨의 직접적인 탈북 동기는 사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재일동포 윗세대가 그렇듯 그 역시 유교적 가족의식이 강했다.

“부모님 묘소가 호화롭다고 비석을 부수고, 봉분을 20센티 이하로 하라며 깎아놓은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 빠져나가다 들키면 몰살당하니까 죽더라도 나 혼자 죽자는 생각이었다”

북송의 고난은 떠난 자만의 몫은 아니었다. 1960년 9월. 도쿄에 사는 전문자(69·오른쪽)씨의 부모와 형제 등 가족 11명이 한꺼번에 귀국선을 탔다. 이웃집에 살던 사촌가족 6명도 함께 북으로 향했다.

히로시마현에서 건설일을 하던 큰 오빠, 한국으로 시집간 언니, 그리고 문자씨 등 3형제만이 남았다. 문자씨는 일본 영화사 일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다. 총련 간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17살부터 열성적인 총련 활동가였던 그는 북한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조국으로 믿었다. 그러나 귀국 2년 뒤부터 자잘한 생활물품을 보내달라는 가족들의 끊임없는 편지를 보고 그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장사를 하면서 근근이 먹고살았다. 북한 정부에 부탁하면 될텐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1970년 아버지, 1985년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1980년 고향방문 일환으로 북의 가족과 20년만에 상봉한 큰 오빠 편에 보내온 어머니의 녹음테이프 목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편지도 잘 보내지 않고 총련과도 발을 끊은 문자씨에 대한 어머니의 섭섭해 하는 심경에 죄스런 느낌 때문이다.

큰 오빠가 짊어진 짐은 더 무겁고 컸다. 히로시마현 한 지역의 총련 상공회 간부를 맡아서 죽을 때까지 북의 가족들에게 돈과 물품을 보냈다. “폐선박을 사서 고철로 만들어 파는 일을 했던 큰 오빠는 1980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미니버스 한대분의 물품을 싣고 갔다. 큰 오빠는 5년 전 죽을 때까지 집도 없이 고생했다.”

지난 10월 도쿄에서 사촌동생을 49년만에 재회한 문자씨는 “편지를 읽으면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이 괴롭고, 그래도 안 읽을 수 없었던” 지난 세월의 응어리를 조금은 푼 듯했다.

“2주 동안 같이 지내면서 북에 간 우리 집안 남자들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사촌동생을 빼곤 모두 병들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의 가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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