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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사라진 풍경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등록 2009-12-30 16:54

사라진 풍경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옛 여인들의 푸념을 받아주던 절구통 우리나라 불교 미술품을 보면 돌을 다듬은 문화재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부처님은 말할 것 없으려니와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있는 석탑, 석등, 부도와 바위에 새긴 마애불 장승 등 돌에 새기거나 돌로 만든 예술품은 그 종류를 다 기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집집마마 돌로 만들어진 생활용품이 있었는데 그 종류 역시 쓰임새와 모양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실내에서 사용했던 돌화로, 다듬잇돌 또 실외에서 사용했던 절구, 확, 구유 등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주택이란 가족들이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평안한 공간이이면 되었지 재산증식의 수단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은 1988년에 구입하여 이사 왔으니 20년 넘게 살고 있는 셈이다. 만약 1988년 주택을 구입하지 않고 아내의 주장대로 아파트를 구해 갔더라면 당시 광주에서 대형 아파트를 구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집이란 시멘트 상자 같은 아파트가 아니고 반드시 주택이어야 하며, 사람은 흙을 밟고 살아야한다는 나의 촌놈식(?) 고집 때문에 아내의 주장은 밀려나고 말았다. 이 후 주택 가격이 아파트 가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아지면서 나는 오랫동안 아내에게 이재에 어두운 사람이라고 핀잔을 들어야만했다. 자세한 내용은 언젠간 집에 관한 생각과 함께 쓸 작정이다.


그동안 몇 번 아파트를 들먹인 적이 있었지만 씨알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인지 아내는 언제부터 오히려 주택의 장점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당의 심어진 비파나무, 대문 울타리를 넘는 넝쿨장미, 장독대를 오르는 능소화, 그리고 이곳저곳에 심어진 철쭉과 상사화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의 정서에 더 애정을 갖는 것 같았다. 마당의 장식용으로 절구통 등 돌로 만들어진 생활도구를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원래 아내는 민속품이라면 남이 쓰던 물건이라며 싫어했는데 마당가의 수도 밑에 물받이용으로 돌구유를 들여놨더니 의외로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뒤로 나는 슬금슬금 석질이 좋고 모양이 아름다운 절구통이며 돌확, 돌구유를 구입하여 마당을 채우기 시작했다. 더러는 아내와 함께 가서 고르기도 했는데 그러는 사이 아내역시 민속품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연대를 따질 줄도 알게 되었으니 옛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10여년이 흐르다보니 맷돌은 마당의 징검다리가 되었고 석등, 절구통, 확, 구유, 그 밖에 다듬이돌이며 돌화로까지 수십 점의 돌이 집안과 밖을 채우는 꼴이 되었다. 3년 전부터 숙지원 조경을 하면서 확과 절구통, 구유 등 몇 점은 그곳으로 옮겼기에 광주 집의 돌 식구는 단출해졌지만 아직도 마당에는 몇 점의 돌이 물양귀비 등 수생식물을 키우는 작은 석지(石池)로, 또 화분을 올려두는 탁자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돌이란 나무처럼 사계절 따뜻한 물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돌로 된 생활 용품은 단단한 특성 때문에 인간의 삶속에 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구석기 시대의 타제석기, 신석기시대의 마제석기가 아니더라도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우리 서민의 삶속에 절구통, 돌확, 맷돌, 다듬잇돌과 돌화로 등은 필수품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는 맷돌로 보리를 갈았고, 떡판에 떡메를 쳐서 떡을 만들었다. 할머니는 풀 먹인 무명베 적삼이며 이불호창을 다듬잇돌에 놓고 다듬이방망이를 도닥거렸다. 저녁 무렵이면 돌확에 겉보리를 넣고 손에 잡히는 작은 확돌로 문지르던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한 겨울이면 작은 돌화로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벗이 되었다. 두 개의 통나무에 귀가 걸린 돌구유는 외양간에 있었고, 엉성한 장방형의 돌구유는 돼지들의 밥그릇이었다. 그러나 우리 고향에서 돌로 만든 구유보다 ‘구시’라는 이름의 나무구유가 흔했다고 기억한다. 그 많은 생활용품 중에서 아무래도 절구통만큼 기억에 남는 물건이 없을 것 같다. 쌀과 보리 등 곡식을 찧는 일이며, 매번 김치를 담그기 위해 양념을 갈고 다지는 일은 물론 겨울이면 메주를 찧는 등 식구들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많은 일이 절구통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절구통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할머니다. 할머니는 빠른 손놀림으로 절구대를 돌려 한주먹 밥과 고추, 마늘, 생강을 넣고 갈아 간이 든 배추를 쓱쓱 비벼 김치를 담그셨다. 그때 한 입 얻어먹은 매콤한 생김치 맛과 함께 절구통 곁의 할머니 모습은 한 폭의 영상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한참 자란 후에도 할아버지가 나무로 만든 절구대는 나에게 결코 가벼운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궁이 불을 감시하랴, 손자 투정을 받아주랴, 또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에 대꾸하랴, 그 바쁜 와중에서도 할머니는 무거운 절구대를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이 창 휘두르듯 가볍게 돌리셨다. 그런 할머니의 힘은 어디서 나왔던 것인지 지금도 나에게는 불가사의로 남는다. 절구통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할머니의 시대가 끝나면서 어머니의 시대에 절구통은 이미 무겁기만 하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물 간 물건이 되어 마당가에서 주인의 눈치나 살피는 신세가 되었다. 아파트 세대인 아내의 시대가 되자 절구통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보리를 갈고 메주를 쓰는 일은 드라마속의 장면이 되었고 김치는 사다 먹는 물건이 되었다. 여인들의 땀과 눈물을 담았던 절구통은 함부로 버려졌고, 그래서 나 같은 촌놈의 마당을 장식하는 하나의 소품이 되고 말았다. 절구통에 간 양념에 비빈 김치를 먹고 싶다고 한다면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을 잃어버린 절구통을 보면서 옛날이 그립다고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아마 지금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들에게 함박눈이 내린 겨울이면 장독대 옆 절구통에 아이스크림처럼 소복하게 눈이 쌓여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한들 아이들에게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도 무던하게 생긴 절구통을 보면 가난했던 옛날이 그리움으로 다가오고,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의 푸념을 담은 구시렁거림이 들리는 것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 절구통을 보면 마음이 시려지는 까닭은 내가 촌티를 못 벗은 옛 사람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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