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와 김포 사이 거친 바다 물길 손돌목


광성보

손돌목을 지키던 손돌목돈대에서 내려다본 손돌목

손돌목돈대의 내부. 반경이 어림 50m 정도에 불과한 진지다

손돌목돈대 주변에서 자생하는 탱자나무. 손돌목돈대 주변은 난대식물인 탱자나무의 자생한계점이다

용두돈대에서 올려다 본 손돌목돈대. 시계 확보를 위해 주변 나무를 베어버렸는데 풍경이 더 을씨년스럽다

최전방인 용두돈대와 광성보, 손돌목 돈대를 연결하는 통로
진(鎭), 보(廣), 돈대(墩臺)는 조선시대의 군사 방어진지로 규모 순이다. 광성진(廣城鎭) 이 가장 큰 범위이며 이 광성진 아래 광성보(廣城堡), 용두돈대(龍頭墩臺), 손돌목돈대(孫乭─墩臺)가 소속되어 있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조선시대 강화도에는 모두 12개소의 진과 보,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다. 1. 만주에서 흥기한 만주족은 스스로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칭하고 1627년 인조 5년에 조선을 침략했다. 그 보다 37년 전, 1592년 임진년(壬辰年)에 왜란(倭亂)이 일어났을 때 당시 임금이 도성(都城)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도망을 쳤던 것처럼 이번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다. 강화도는 좁은 해협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섬이고 바다와 섬 사이 좁은 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거칠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 이 좁은 해협은 물살이 거칠게 흘러 가기로 마치 바다가 아닌 강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하여 이를 염하(鹽河)라고도 한다. 이 거친 해협을 건너는 나룻배의 사공으로 생업을 이어가던 이의 이름이 손돌(孫乭)이었다 한다. 손돌은 외적이 국경을 넘어오자 섬으로 줄행랑을 치는 임금을 태우고 물살 빠르고 험한 해협에 나룻배를 띄워 노 저어 나아갔다. 험한 물살에 배는 요동 쳤고 이렇게 험한 물길 위에 뜬 배를 처음 타보았을 임금은 무척 불안했을 것이다. 그때 임금의 머릿속에는 선대 임금이 외적을 피해 줄행랑을 치자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 불을 싸질러 버린 이름없는 민초(民草)들이 떠올랐던지 모르겠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역사의 이름 앞에 반동(反動)에 다름아닌, 억지스러운 반정(反正) 끝에 어부지리로 임금자리에 오른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 훗날에 인조(仁祖)로 추존된 임금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거센 물살 위에서 임금은 뱃사공을 의심했다. ‘이 놈이 나를 사지(死地)로 몰고 가려는 게 아닌가?’ 외적을 피해 도망치는 임금은 그 순간에는 위엄을 되찾아 ‘저 사공 놈을 죽이라’는 추상 같은 어명을 내렸다 한다. 야사(野史)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죽기 전 손돌은 ‘제가 띄우는 바가지를 따라 배 저어 가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고 임금은 무사히 강화도로 도망을 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내가 사공을 의심했구나. 나의 잘못이다.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 지내도록 하라.’는 어명을 내리셨다고 한다. 이름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는 바, 보잘 것 없는 뱃사공이 무덤으로 오늘날 그 흔적을 남긴 것은 보면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라는 어명은 지켜진 것 같다. ‘나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하는 임금의 후회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 손돌의 묘지는 강화도 역사유적지 광성보(廣城堡) 맞은 편 김포의 덕포진에 있다 하고 이후 사람들은 손돌의 목이 잘린 곳이라 하여 강화도 광성보와 김포 덕포진 사이의 물길을 손돌목이라 부른다 한다. 그리고 손돌목에서 올려다 보이는 강화 쪽 높은 언덕에는 외적을 지키기 위해 쌓아놓은 손돌목돈대(孫乭─墩臺)가 또 손돌목의 거친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1627년에 맛 뵈기만 보여줬던 만주족은 중국대륙을 석권한 다음 국호를 청(淸)이라 칭하고 1636년 다시금 조선을 침략했다. 이번에 임금은 강화도가 아니라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 했다. 정사(正史)는 원래 임금이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이미 청나라 군대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발 길을 돌린 것이라 전한다. 죽어야만 혹은 죽어서야 진심을 보인 손돌이 없는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가기가 꺼려져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쳤는지 피했는지 그랬을 것이라는 야사(野史) 한 토막이 더 얹어져도 이상하게 읽혀질 것 같지 않다. 2. 손돌이 죽은 후 그래서 손돌이 죽은 강화해협 그 물길에 손돌목이라는 이름이 붙은 후 244년이 흐른 1871년 손돌목에 두 척의 군함이 출현했다. 세계를 무대로 제국주의 침략 경쟁에 뒤 늦게 뛰어든 미국의 태평양 함대 소속 군함들이었다. 이들은 1866년에 있었던 제네랄 셔먼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자국민 피해에 대한 사과와 통상 개항을 조선 정부에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굳은 쇄국의 결의와 무력 대응으로 이들의 요구에 응수했다. 1866년 중국 텐진(天津)에서 출발한 미국인 소유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서해를 건너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거슬러 올라가 배를 정박시킨 채 통상을 요구했다.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린 조선으로 봐서는 정체불명의 선박이 영해에 출몰한 것은 정직하게 말하면 예고된 수순이었고 정체불명의 선박이 아니었다.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그리고 아시아 대륙으로 이어진 서 유럽인들의 탐욕적 침략은 16세기부터 봇물이 터지듯 시작되어 19세기에 이르자 그들이 말하는 아주 먼 동쪽, 극동(Far East)에까지 이르렀다. 제국주의의 침략은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해일(海溢)처럼 극동의 조용한 왕국 조선에까지 닥쳤다. 1636의 호란(胡亂) 이래 조공으로 섬겨왔던 청나라의 사정을 통하여 조선 조정은 거부할 수 없는 제국주의 침략의 마수가 뻗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적 격랑을 자주적으로 풀어갈 능력도 그럴 생각도 없던 조선의 집권층은 소극적인 쇄국으로 일관했다. 제너럴 셔먼호의 오만방자한 행동에 조선 정부는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고 결국 배는 불타고 미국인을 포함한 선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자국민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사실에 미국 정부는 분기탱천했고 이를 빌미 삼아 당시 제국주의 침략의 공식대로 무력을 사용, 자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통상조약을 체결하겠다는 목표를 정한 후 제네랄 셔먼호 사건 5년 후인 1871년 5척의 군함에 90문의 대포, 800여명의 병력을 싣고 조선 침략원정에 나섰다. 5척의 군함은 오늘날 영종도 부근을 정박지로 결정하고 그 중 2척을 앞세워 644명의 해병을 강화도에 상륙시킨 다음 초지진(草芝鎭)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했다. 이어 북쪽의 광성보(廣城堡)에까지 쇄도한 미군은 600여명의 조선군과 접전을 벌이게 된다. 양측 군대의 접전은 상대가 상대를 향해 벌인 전투로 부르기에 너무도 일방적이었고 조선군은 참혹하게 패배했다. 미군이 3명의 전사자를 내는 동안 조선군 340여 명이 전사했던 것이다. 심지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화승총(火繩銃)과 전 근대적인 불랑기포(佛狼機砲)로 무장한 조선군은 당시 기선(汽船)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건너온 미국군대에, 기계식 격발 장치를 가진 플린트 락(flint lock) 소총과 근대적 대포로 무장한 미국군대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투는 치열했고 조선군은 광성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 등성이 자리잡은 손돌목돈대(孫乭─墩臺) 로 밀려 올려가 농성을 벌였다. 미군은 대포로 어림 반경이 50m 정도에 불과한 손돌목돈대에 정확한 조준사격을 퍼부은 다음 돈대 안에 돌입했다. 이어진 육박전은 전투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손돌목돈대의 처절한 전투의 흔적은 당시 미군과 함께 원정대에 참여한 사진작가 비토(Felice Beato)가 찍은 사진으로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將軍旗)는 미군에게 빼앗겨 승전 전리품으로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다가 2007년에야 임대 방식으로 다시 우리 나라로 돌아왔다. 조선군이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듯 처참하게 광성진에서, 손돌목돈대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조선 조정은 미군과 교섭을 거부한 채 버티기로 일관했다. 사정이 이렇게 풀려가자 소규모 원정대를 파견한 미군으로서는 무한정 주둔 상태를 유지할 여건이 되지 못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포함외교를 바탕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철수하게 된 것이다. 1871년 7월 3일이었고 조선 침략을 시작한 이래 40여일 만이었다. 미군이 물러난 후 전투 중에 사망한 조선군 전사자 사체가 수습되었으리라. 조선군 전사자 대부분의 사체는 연고를 밝힐 수 없었으며 그 일부가 손돌목돈대 아래 “무명용사의 묘”로 남아 오늘날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조선군 20명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전투를 포기한 자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애초 싸움이 되지 않을 만큼 전력 차가 확연하다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도 죽어 연고조차 밝힐 수 없던 ‘이름없는’ 민초들이 죽음으로 막아내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미군이 물러간 뒤 5년 후, 1876년에 군함 두 척과 4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미군과 똑 같은 방법으로 강화도로 침략해 들어온 일본군에 대해 교섭에 응한 조선정부는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역사책에서 가르치는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말한다. 이로부터 사실상의 망국(亡國)에 다름아닌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1905년까지는 채 30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곳에,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에서 역사(歷史)는 이루어지게 마련이고 오늘날 잘 단장된 역사 유적지의 풍광이 대체로 아름다운 이유도 그곳이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곳인 까닭이며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인 까닭일 것이다. 다만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남겨놓은 역사가 아름답지 않은 일이 많을 뿐. 아름다운 강화도의 덕진진, 초지진, 광성진 그리고 이들 진들이 거느리고 있는 보와 돈대 중 신미양요와 관련된 유적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이던 1976년에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 우선 복원되었는데 혹자는 그 까닭이 당시 미국과 무척 심한 갈등 보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각별한 ‘각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도 했다. 2010년 겨울, 강화도 손돌목의 물살은 어느 때보다 거세고 손돌목돈대 아래 놓여 있는 신미양요 무명 용사 묘역에는 겨울 추위로 잔설(殘雪)이 녹지 않았다. 지난 해 12월 17일 발표된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지금까지 필수로 지정되어 있던 고등학교 1학년의 역사가 선택 과목으로 변경되고, 고등학교 2, 3학년 역사 과목 중에 한국문화사가 제외되며 동아시아사와 세계사가 선택과목으로 결정되었다 한다. 국사(國史)는, 역사는 ‘선택’이 아니지만 역사의 기술(記述)은 언제나 선택적이다. 선택적으로 기술된 역사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고등학교의 역사 수업이라면 그 수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앞 뒤가 잘 맞지도 않는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손돌목’에서 불어오는 차갑디 차가운 겨울 바람 앞에 ‘손돌목돈대’의 잔설을 다지며. Oalbatross _Andre_Gagnon_ 'Bleu_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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