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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헬리콥터 맘’의 대학진학

등록 2010-01-15 17:22

미국에서 15년 이상 살다가, 그것도 대학과 관련해 먹고 살다가 귀국하니, 지인들의 의뢰가 더러 있었다. 조기 유학을 가 그곳에서 고등학생인 자녀들이 이제 대학에 지원해야 하는데, 그 곳 실정을 알 수도 없어 답답하고, 강남의 유학원은 금액이 비쌀 뿐만 아니라, 그 정성과 꼼꼼함을 마음 편히 믿을 수도 없으니, 나더러 자기 자녀의 대학 지원 과정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섭섭하지 않게 보상도 해 주겠다는 강제성 부탁도 좀 있었다. 일의 과정을 아는 사람에게 그 일 자체는 사실 무지 간단하고 쉽지만, 나는 정말 용기내어 거절하곤 했다.

왜냐하면 미국사회의 계약 관계와는 달리, 끈끈한 정으로 묶인 한국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맡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두고두고 떠안아야 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게 부탁해 오는 사람들은 대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인데, 평생 지고가야 할 부담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말 거절할 수 없는 상대는 지근거리의 인척이었다. 내 친한 친구라면, 오히려 한 마디로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지만, 친인척은 좀 다르다. 8촌 이내에 드는 가족[小宗]이라는 게 층층시하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처가쪽에서 대놓고 부탁(?)을 하면, 사실 사위로서 매정하게 거절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차라리 불가능하다는 게 맞다. 섣불리 거절했다가는 별 희한한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다.

그래도 구설수 정도는 감수하겠는데, 노구의 장인 장모님께서 사위를 원망한다며 자리 펴고 드러누우시면, 정말 대책이 없다. 그래서 결국 지난 가을에 처조카 한 명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역시 아니나 다를까...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지원 과정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내 생각은 처조카 애가 에세이와 personal statement 쓰는 과정에서 코치를 해 주겠다는 뜻이었고, 학교 지원서를 작성하여 보내기 전에 내가 한 번 꼼꼼하게 봐주겠다는 뜻이었고, 혹시 인터뷰를 하는 학교의 경우에는 모의 인터뷰를 해 주겠다는 것이었으며, 객관적인 표준화 점수들을 토대로 safety school(원하는 대학에 모두 안 될 경우에 대비해 안전하게 하향 지원하는 학교)들을 제시해 주겠다는 정도의 뜻이었다.

그쪽에서는 쌍수로 환영하며 그렇게 해 달라고 했고, 200만원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가까운 인척 사이에 그럴 필요도 없고, 또한 돈을 일단 받으면 그 순간 고용 관계가 성립되고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르기에 완곡히 거절하였다. 그런데 전화를 끊은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200만원이 아내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나는 그저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처조카(여학생)는 미국에서 2년 이상 사립 고등학교를 다닌 상태라, 영어도 곧잘 하고,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 일단 학생의 장래희망과 학교 성적을 지표로 삼아 지원 가능 대학들의 목록을 뽑고, 그 후에 각 대학의 특성과 장단점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이 모든 상담(대화)는 나와 처조카 사이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엄마... 곧 나의 처형하고 이루어졌다.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학생 본인이 미국에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에세이에서 발생했다. 고주알미주알 쓰기도 귀찮아 생략하고, 골자만 말하면 이렇다. 내가 애초에 생각한 "도움"이란 학생이 에세이를 써서 보내면 내가 코멘트와 함께 기본적인 fix 및 idiomize 를 해 주고, 그러면 학생이 그걸 참고해 다시 써서 보내고, 그러면 내가 그걸 또 한 단계 높여 코멘트 해주고, 그러면 학생은 또 그걸 참고해 보다 양질의 짜임새 있는 draft 를 써서 내게 보내고, 나는 그걸 또 코멘트하고... 이런 식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처음부터 박살났다. 그 부모, 곧 처형으로부터 들은 얘기의 골자는 이랬다. "아니, O서방이 에세이 다 써 주는 거 아니었나? 우리 애는 학교 시험 공부하랴, 토플 다시 보랴, SAT 한 번 더 보랴,, 너무 바빠요. 에세이 정도는 O서방이 그냥 써 주지 뭘 그래... 그게 빠르고 좋잖아요..."

나는 당장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200만원은 다시 보내드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후폭풍은 의외로 컸다. 미국 살다 오더니, 한국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거 좀 안다고 너무 뻣뻣하네... 이런 말은 그래도 그런대로 들어줄 만하다.

그런데 노구의 장인 장모님까지 나서서, 아니 O서방 자네가 이 무슨 일인가... 사람이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가... 아... ㅠㅠ 심지어 아내까지도, 여보 이번 일만 딱 눈 감고 해 주고 다음부터는 일체 맙시다. 이제 와서 당신이 그만두면, 지금 급하게 유학원을 알아보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더 든대... 여보.. 이번 한 번만... 이런 식으로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바람에, 또 명절 때마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조카이자 처형이기에 하는 수 없이 다시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물론, 에세이는 어디까지나 학생 스스로 쓴다는 확약을 받은 뒤에...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처형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내 아내를 들들 볶았다.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볶았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일의 당사자인 처조카는 항상 열외였다. 존재 자체를 모를 정도였다. 모든 대화와 상담은 늘 처형의 몫이었다.

심지어 처조카가 자기 학교 선생들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는 것까지도, 처형이 내게 연락하고, 결국에는 내가 이메일로 문안을 만들어 보내주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더러 학교 선생에게 전화를 부탁했다. 물론, 정말 필요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전화해 줄 수 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안이라는 게 너무나도 웃겼다. 처조카가 구두로 추천서를 부탁했더니, 카운셀러가 바쁘다면서 다음에 오라고 하니, 나더러 대신 전화해 추천서를 부탁해 달라는 식이었다.

내 상식에 그런 카운셀러도 없을 뿐더러, 더우기 비싼 학비 받는 사립학교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건 학생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지, 다른 사람이 나설 일이 아니다. 이게 무슨 유치원도 아니고, 고등학생이 그런 거 하나하나 일일이 엄마에게 조르륵 말하고, 엄마는 네게 득달같이 말하고... 나는 정말이지, 내 처조카가 도대체 지금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 오히려 내 스스로 학교 교장과 카운셀러 두 명과 통화를 해 보았다.

처조카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도 잘 했다. 다만, 여기서 시시콜콜 말할 필요는 없어 뛰어넘지만, 골자는 친구와의 다양한 교류가 부족하고, 친구를 사귀는 것을 불편해 한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처형에게 이 말을 해주었더니, 눈가를 적시며 하는 말...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어린 것이 얼마나 고생일까... 그게 안타까워서라도 이 엄마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도와주고 싶다나.... 이번 대학 지원도 그 일환이라나, 뭐라나...

주변에 알아보니, 엄마와 딸이 단짝 친구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참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단짝 친구가 엄마와 딸뿐일 때이다. 이런 경우가 정말이지 주변에 의외로 많다. 엄마와 딸은 지구 어디에 있든, 늘 전화기를 붙들고 산다. 모든 희로애락을 둘만 나눈다. 그러면서 둘 다 자기연민을 층층이 쌓아간다. 그러니 이 둘 사이에 끼어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편도, 아빠도 어림없다. 모두 정신병자들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헬리콥터 맘... 엄마가 너무 드세고 자녀가 유순해서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엄마와 자녀가 너무 상호연민에 빠져 끝없이 빠져들어 발생하는 <헬리콥터 맘>과 <꼭두각시 키드>들도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이들에게는... 에세이를 대신 써 주는 건 일종의 사기요, cheating이요, 범법이라는 말도 도무지 먹혀들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는 내가 오히려 위아래도 모르는 건방진 놈이 된다.

처형이 아닌 다른 사람... 아내의 친구를 통해 최근에 들은 얘기는 이렇다. 강남의 유학원에서 미국 대학 지원 과정 일체를 해 주고 받는 금액은 학생당 최소 700만원 이상이며, 대개 천만원 안팎이라 한다. 물론 학생이 할 일은 전혀 없다. 그저 짜여진 일정에 따라 필요한 시험만 보면 된다. 모든 것은 유학원이 알아서 해 준다. 모든 지원서에 필수로 들어가는 학생 본인의 싸인을 대신하는 것은 기본이요, 심지어 추천서나 학교 성적표를 조작하는 것에 이르까지... 그러니, 처형은 나를 얼마나 이상한 눈으로 보았을까?

아...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 이 땅의 현실이다. 이 나라, 이 땅의 미래를 짊어질 젊디 젊은 팔팔한 학생들을 어른들은 왜 이다지도 짓밟아 죽인단 말인가... 밤에 잠이 잘 안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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