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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전화먹통 5원 배상해야”…민사판결에 비친 역사

등록 2010-01-17 09:36

우리나라 사법부 60년의 역사는 영욕이 깃든 대한민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역사를 가로질러 존재한 법은 국가 정체성의 산물이자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이었으며,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법의 투영방식인 각종 재판은 사회적 상황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는데, 특히 민사재판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성격과 가치체계를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한다.

법원행정처가 사법 60년을 기념해 발간한 '역사 속의 사법부'는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화제가 됐던 민사재판을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역사적 무게가 실려 있으면서도 당시의 사회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주요 판결을 소개한다.

◇국민의 대일청구권 = 해방 이전 강제로 몰수된 재산을 되찾는 길을 연 '한일 재산 청구권 협정'이 발효된 후인 1968년 서울민사지방법원에는 국가를 상대로 일본강점기 은행에 예치했다가 몰수된 재산을 보상해달라는 소송이 제기됐다.

원고는 '한일협정'에 일본 정부가 한국 국민에게 진 채무를 청산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으므로 우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으로 국민의 재산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정부가 일본과 협정을 체결하고 청구권 자금을 받은 것은 국민 개개인의 수임자나 대리인으로서 한 것이 아니고, 국민 개별 보상에 대한 기준이나 종류 등을 정한 법률이 따로 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도 개별 보상의 구체적인 내용과 한계에 대해 별도의 법률이 제정되기 전에는 법률상 이를 행사할 방법이 없다며 1심 판결을 유지했다.

정부는 한일수교에 따라 일본 정부로부터 유ㆍ무상차관으로 6억 달러를 지급받았지만 법적 미비로 일본강점기 재산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들 자금 대부분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으로 사용됐다.

◇재외 근로자의 '근로기준법' 적용 = 1960년부터 25년간 지속된 베트남전쟁 기간 한국군의 파병과 함께 많은 근로자가 베트남에 파견되면서 국내 '근로기준법'이 외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됐다.

서울민사지방법원은 국내 한 무역업체와 계약을 맺고 현지에서 일한 근로자들이 임금지급을 청구한 소송에서 해외 파견 근로자들에게도 근로기준법이 적용된다고 보고 미지급 임금 전액을 주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근로계약의 두 당사자가 한국 법인과 우리 국민일 뿐더러 최초의 근로계약이 우리 영역 내에서 체결됐고 계약서도 한글로 작성된 점 등을 참작했다.

또 근로시간을 국내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시간으로 합의한 점에 비춰 당사자 사이에 근로기준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묵시적 합의가 있다고 봤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운전원과 정비원으로 일하기로 계약한 근로자들이 근로기준법이 정한 연장 및 야간수당 등을 청구한 소송에서는 연장수당 등에 관한 근로기준법 규정은 공법규정이어서 베트남의 해당 법규를 적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도 우리 국민 사이의 고용계약에 따른 근로이므로 취업 장소에 상관없이 근로기준법이 적용된다며 근로자의 권익을 보다 폭넓게 해석했다.

◇공비출현 신고에 '복지부동' 국가 배상 = 1968년 1월21일 서울시내에 무장공비가 나타나자 한 시민이 서대문경찰서 홍제동 파출소에 세 차례나 간첩신고를 했다.

'청와대 기습사건'으로 잘 알려진 이 사건 당시 상황 발생에 따라 파출소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과 군 장교 등은 간첩인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출동하지 않았고, 그동안 그 시민은 공비와 결투를 벌이다 공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대법원은 사망한 시민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 사고가 당시 군ㆍ경 공무원들의 직무유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국가 배상 판결을 내렸다.

국민의 권익은 행정권의 지나친 행사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행정권이 행사되지 않아 침해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당시 관심을 끈 판결이었다.

◇공중전화 먹통에 '5원 배상' 소송 = 공중전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그때는 전화국이나 우체국 안에 전화를 두고 관리인이 앉아 이용자에게서 돈을 받는 방식이었다.

8년이 지난 1962년에서야 동전 투입 방식의 공중전화가 서울시내에 첫선을 보였다. 수 일식 걸리는 서신교환이 주요 소통수단이었고 전화를 설치한 집이 드물었던 당시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동전투입식 공중전화의 보급은 가히 '통신혁명'으로까지 인식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시민이 1970년 5원짜리 동전을 넣고 전화를 돌렸으나 통화는 되지 않은 채 전화기가 5원을 삼켜버리자 국가를 상대로 5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결과는 원고 승소였다. 공중전화기는 통신의 편의를 위해 공공의 목적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국가배상법이 규정한 공공의 영조물이고, 동전이 나오지 않은 것은 전화기 관리나 설치의 하자에 해당한다는 게 당시 법원의 판단이었다.

거의 전 국민이 휴대전화를 보유함에 따라 이용자가 거의 없는 공중전화부스가 도시미관을 해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지금으로서는 황당하게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던 '화제의 판결'이었다.

◇성희롱에 의한 손해배상 = 1990년대에는 여성 근로자가 늘어나면서 직장 내 '성희롱' 문제가 새롭게 대두했다.

1993년 일명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은 국내 처음으로 직장 성희롱이 문제가 된 사건으로 당시 사회적 이목을 받았다. 성희롱으로 소송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많은 남성이 놀라움을 나타냈다.

서울대 한 교수가 여성 조교에게 각종 실험기기의 조작방법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어깨와 손 등 조교의 실체 일부를 건드리고 연구실로 불러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몸매를 감상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사건의 내용이었다.

법원은 "가해자의 행동은 성적인 동기와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고, 한정된 시간 동안 집요하게 계속한 점에 비춰 사회통념상 일상생활에서 허용되는 호의적인 언동이라기보다는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법원의 이런 판단은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동안 남성들이 자연스럽게 일삼은 성적 언행이 성희롱으로 규정될 수 있고, 성폭력뿐 아니라 성희롱도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징계조치를 의무화한 '남녀고용평등법' 개정과 공공기관을 포함한 사업체에서 성희롱 방지를 위한 교육의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규정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이어졌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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