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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성공회대학교 황선길 교수의 '지구화와 대안사회' 수업에서 작성, 제출했던 기말보고서이다. 보고서의 문제는 "존 레논John Lennon의 <이매진Imagine> 가사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상상하는 미래 사회를 설명하라"였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봐요 하려고 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죠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오직 위에 하늘만이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오늘 하루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 봐요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니죠 죽이는 일이나 죽는 일도 없고, 종교도 없다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 봐요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당신은 날 몽상가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랍니다 언젠가 당신도 함께 하길 원해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되겠죠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소유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탐욕을 부리거나 굶주릴 필요도 없고 인류애로 뭉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 ‘국가’가 아닌 ‘거주지’ : 국가와 민족으로부터의 자유, 나를 위한 자유 내가 한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적과 국민성을 부여 받고 ‘한국인의 정신’ 따위에 열광하게끔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이 불쾌했다. 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와 민족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인간이 국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고 우연적으로 태어나 거주하게 됐을 뿐임을 인정한다면, ‘국가’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그 영토는 단순히 ‘거주지’의 개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민을 선택하는 데에도 이전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 절차야 까다로울 수는 있지만 이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국적’을 변경할 때에는 국민성 전부를 부정하겠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거주지’를 변경하는 것은 마치 이사를 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주지 않는가? 이민이 거주지를 변경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예전에 가수 유승준이 미국 시민권을 땄을 때처럼 민족을 배반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국가와 나를 독립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 대상에 무턱대고 충성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이상한 사회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얼마나 약한 논리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 개나 소나 국회의원인 국회 : 국회의 민주화 나는 예전부터 국회의원의 수가 적은 게 불만이다. 국회가 국민을 정말 대표할 수 있으려면 소수여서는 안 된다. 국회는 국민의 구성비가 적절히 압축된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목표를 달성하기가 쉬워진다. 만약 한국 사회의 성비가 남성이 51%, 여성이 49% 있다면 국회의원의 성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또 직업별 비율도 고려해서 주부, 학생, 상인, 기술자, 교사, 의사, 배우, 철학자 등 다양한 직종이 국회를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수자의 비율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 장애인이 10% 있고, 이주노동자가 7% 있고, 동성애자가 5% 있다면 국회도 똑같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국회의원의 수가 많아야 한다. 한국의 구성비가 국회에 제대로 갖춰지려면 국회의원의 수가 1만 명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10만 명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즉, 개나 소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직업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 세상을 멀리 하고 국회의사당 속에 처박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특권을 가진 집단이 아니고, 늘 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국회의원이었으면 한다. ✔ 교과서와 성적표가 없는 학교 : 교육혁명, 대안교육의 일반화 나는 얼마 전에 내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총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초·중·고등학교 때에는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만 빼고 6일이나 등교했던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한 일이라곤 학교에 처박혀 있었던 일 밖에 없다. 주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까 더욱 끔찍한 기분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년이 넘도록 학교 안에서만 생활했다는 것은, 학교 바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적게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라는 공간이 그렇게 가치 있는 곳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일단 교과서가 매력이 없다. 그런데 몇몇 대안학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학교가 그 교과서를 채택한다. 모든 초등학생들이 ‘너, 나, 우리, 대한민국’을 배우고 모든 중학생들이 똑같이 황순원의 ‘소나기’를 배우고, 모든 고등학생들이 공자, 맹자의 철학을 배우지 않나. 다 똑같은 것을 배우는데 어떻게 창의력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냐는 말이다. 교과서가 없는 학교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이것은 대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도 현재 대학교의 수업에서처럼 일정한 주제를 갖고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교재가 필요하다면, 학생과 교사가 상의해서 앞으로의 수업에서 참고할 텍스트를 정할 수도 있다. 그 텍스트는 시나 책이 될 수도 있고, 그림이나 영상물이 될 수도 있다. 학교에서 사라져야 할 또 한 가지는 성적표이다. 성적을 채점하는 것이 학생들의 교육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 나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봐도 성적표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성적대로 서열을 부여하여 통제하고자 하는 교사, 학교, 기업을 위한 것이다. 성적표가 없다면 학생들은 더 이상 억지로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고,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낄 일도 없어질 것이다. 또 성적표가 없다는 것은 곧 시험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시험공부를 하느라 자신의 생활을 포기할 일도 없어질 것이다. 물론 이런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사의 육성제도가 현재에서 크게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식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 결혼식 없는 결혼, 도장 찍지 않는 이혼 :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헤어지기 사람이 사랑하고, 싫어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자연스러운 일들이 그 분기점마다 제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그래서 불행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결혼과 이혼은 이 사회에서 너무나 불필요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반드시 결혼해서 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것을 관두겠다고 할 때에 법정까지 가서 난생 처음 보는 판사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결혼한다고 상상했을 때 가장 끔찍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제껏 혼자 방을 쓰다가 어느 특정한 날 이후부터는 다른 사람과 함께 방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열 살 즈음에 사랑해 마지않는 여동생과 방을 따로 쓰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집에 손님이 와서 여동생과 한 침대에서 자야 하는 날이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이기적인 의미에서 혼자만의 공간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만의 공간은 자아를 성찰하고, 삶을 설계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고집하는 것이다. 아직 독립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만약 독립해서 혼자 산다면 결혼한 뒤 상대방과 집을 합치는 것도 내겐 끔찍하게 느껴질 것 같다. 물론 상대방에게 각자의 생활공간에서 생활을 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연애한 상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도저히 설득이 되지 않는 문제이다. 나는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존에 존재하는 결혼이라는 포맷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들은 한 집에서 못 볼 꼴 다 보면서 사랑하는 것만이 결혼의 유일한 형태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결혼과 이혼의 개념이 없는 사회를 바란다. 있다고 해도 혼인신고나, 이혼서류 등 제도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또 그 형태가 각자의 개성마다 달랐으면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합치고, 어떤 사람들을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며, 헤어져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 각자의 방법대로 헤어지면 좋겠다. 헤어지고 싶은데 그 사이에 자녀가 생겼다면 그 문제도 역시 각자가 해결할 일이다. ✔ 배고프지 않은 예술가 : 직업 선택의 자유와 문화의 다양성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1930년대에 시행된 ‘앵떼르미땅’ 법이 있다. 이 법이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가까이서 보진 못했지만, 들은 바로는 예술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일을 하지 않을 때에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법이라고 한다. 만약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감독이나 배우뿐만이 아니라 조명 스태프, 분장 보조, 지나가는 사람3까지 모두 다 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예술직종은 다른 일과 달리 고정 업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영화 작업을 할 때에만 바쁘지 일이 없을 때에는 한가하다. 작가도, 음악가도, 화가도, 사진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직종 종사자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예술을 관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예술 작업을 상업주의와 타협할 수 있다. 프랑스는 이러한 상황이 프랑스의 예술 다양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나는 사진을 찍거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에 재미를 느낀다. 글을 쓰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내는 사진, 영화, 글 등의 생산물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줄 것 같지는 않다. 즉, 돈을 벌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 말고 다른 일을 하는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없다. 그래서 ‘앵떼르미땅’ 법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희망을 느꼈다. 이러한 법이 예술직종 종사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직종의 종사자에게까지 적용된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사람들은 마음 놓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섹스하는 장애인 : 소수자 인권의 확립 2007년 겨울, 1호선 전철에서 어느 뇌성마비 장애인 남성이 승객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돈을 건네는 승객에게 도리어 화를 내면서 자신은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부정확한 발음에 익숙해졌고, 그는 내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던 중에 그는 휠체어를 끌고 내 자리 앞으로 와서 할 말이 있으니 잠깐 같이 내려달라고 했고, 나는 그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전철이 떠나고 승강장에 남은 그는 내게 말했다. “자매님과 자고 싶어요. 나는 야한 사람이에요.” 나는 내가 보인 지나친 친절, 그러니까 가슴이 따뜻한 체 하며 장애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실제로는 비장애인의 우월감을 드러냈던 그 오만한 행동이 장애인에게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일본의 작가 가와이 가오리가 쓴 『섹스 자원봉사』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 장애인의 성욕이 비장애인의 성욕과 비교했을 때에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충족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고, 그래서 ‘섹스 자원봉사자’가 장애인의 억눌린 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위를 돕거나 성관계의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섹스 자원봉사자가 장애인의 육체적 성욕은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으나 심리적 성욕, 다시 말해서 사랑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동권이야 약간의 공사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사랑권, 섹스권은 기술이 아닌 마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준에 도달한 사회라면, 장애인만이 아니라 현재 ‘소수자’라고 불리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모든 편견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 토론프로그램으로 경쟁하는 방송국들 : 언론의 정치화 나는 언론이 정치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치화’라는 것은 특정 정치세력과 친밀해진다는 뜻이 아니고 ‘탈정치화’의 반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언론이 탈정치화되면 시청자도 탈정치화되고, 언론이 정치화되면 시청자도 정치화된다고 말이다. 방송국이 토론프로그램을 프라임 시간대에 편성하고, 각 방송사가 얼마나 재미있는 주제로 공정하게 토론을 진행하는가로 경쟁한다면 시청자들의 정치적 지식수준과 관심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것이다. 또 올바른 토론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에서도 올바른 토론, 올바른 대화, 올바른 수다 문화가 나타날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사족을 단다. 나는 이 강의에서 소규모 공동체에 관한 학자와 활동가의 견해를 접하면서, 또 존 레논의 노래를 들으면서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존 레논이 괜히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이라고 우려한 것이 아니다. 나는 소유 개념이 없는 인간이, 그리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물리적 공간과 생산물을 공유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규모가 작은 집단에서는 그나마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의 보편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도 잘 상상할 수가 없다.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잘 상상한 것처럼 굴어볼 수도 있었겠으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소유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소유’와 ‘사유재산’이 한 학기 강의 내내 키워드와 같았는데 그 부분에 대해 끝내 상상할 수 없었다는 점이 무척 아쉽다. 이것을 앞으로 내가 해내야 할 개인적 과제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당신은 날 몽상가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랍니다 언젠가 당신도 함께 하길 원해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되겠죠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소유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탐욕을 부리거나 굶주릴 필요도 없고 인류애로 뭉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 ‘국가’가 아닌 ‘거주지’ : 국가와 민족으로부터의 자유, 나를 위한 자유 내가 한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적과 국민성을 부여 받고 ‘한국인의 정신’ 따위에 열광하게끔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이 불쾌했다. 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와 민족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인간이 국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고 우연적으로 태어나 거주하게 됐을 뿐임을 인정한다면, ‘국가’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그 영토는 단순히 ‘거주지’의 개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민을 선택하는 데에도 이전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 절차야 까다로울 수는 있지만 이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국적’을 변경할 때에는 국민성 전부를 부정하겠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거주지’를 변경하는 것은 마치 이사를 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주지 않는가? 이민이 거주지를 변경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예전에 가수 유승준이 미국 시민권을 땄을 때처럼 민족을 배반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국가와 나를 독립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 대상에 무턱대고 충성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이상한 사회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얼마나 약한 논리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 개나 소나 국회의원인 국회 : 국회의 민주화 나는 예전부터 국회의원의 수가 적은 게 불만이다. 국회가 국민을 정말 대표할 수 있으려면 소수여서는 안 된다. 국회는 국민의 구성비가 적절히 압축된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목표를 달성하기가 쉬워진다. 만약 한국 사회의 성비가 남성이 51%, 여성이 49% 있다면 국회의원의 성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또 직업별 비율도 고려해서 주부, 학생, 상인, 기술자, 교사, 의사, 배우, 철학자 등 다양한 직종이 국회를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수자의 비율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 장애인이 10% 있고, 이주노동자가 7% 있고, 동성애자가 5% 있다면 국회도 똑같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국회의원의 수가 많아야 한다. 한국의 구성비가 국회에 제대로 갖춰지려면 국회의원의 수가 1만 명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10만 명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즉, 개나 소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직업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 세상을 멀리 하고 국회의사당 속에 처박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특권을 가진 집단이 아니고, 늘 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국회의원이었으면 한다. ✔ 교과서와 성적표가 없는 학교 : 교육혁명, 대안교육의 일반화 나는 얼마 전에 내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총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초·중·고등학교 때에는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만 빼고 6일이나 등교했던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한 일이라곤 학교에 처박혀 있었던 일 밖에 없다. 주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까 더욱 끔찍한 기분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년이 넘도록 학교 안에서만 생활했다는 것은, 학교 바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적게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라는 공간이 그렇게 가치 있는 곳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일단 교과서가 매력이 없다. 그런데 몇몇 대안학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학교가 그 교과서를 채택한다. 모든 초등학생들이 ‘너, 나, 우리, 대한민국’을 배우고 모든 중학생들이 똑같이 황순원의 ‘소나기’를 배우고, 모든 고등학생들이 공자, 맹자의 철학을 배우지 않나. 다 똑같은 것을 배우는데 어떻게 창의력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냐는 말이다. 교과서가 없는 학교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이것은 대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도 현재 대학교의 수업에서처럼 일정한 주제를 갖고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교재가 필요하다면, 학생과 교사가 상의해서 앞으로의 수업에서 참고할 텍스트를 정할 수도 있다. 그 텍스트는 시나 책이 될 수도 있고, 그림이나 영상물이 될 수도 있다. 학교에서 사라져야 할 또 한 가지는 성적표이다. 성적을 채점하는 것이 학생들의 교육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 나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봐도 성적표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성적대로 서열을 부여하여 통제하고자 하는 교사, 학교, 기업을 위한 것이다. 성적표가 없다면 학생들은 더 이상 억지로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고,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낄 일도 없어질 것이다. 또 성적표가 없다는 것은 곧 시험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시험공부를 하느라 자신의 생활을 포기할 일도 없어질 것이다. 물론 이런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사의 육성제도가 현재에서 크게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식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 결혼식 없는 결혼, 도장 찍지 않는 이혼 :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헤어지기 사람이 사랑하고, 싫어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자연스러운 일들이 그 분기점마다 제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그래서 불행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결혼과 이혼은 이 사회에서 너무나 불필요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반드시 결혼해서 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것을 관두겠다고 할 때에 법정까지 가서 난생 처음 보는 판사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결혼한다고 상상했을 때 가장 끔찍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제껏 혼자 방을 쓰다가 어느 특정한 날 이후부터는 다른 사람과 함께 방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열 살 즈음에 사랑해 마지않는 여동생과 방을 따로 쓰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집에 손님이 와서 여동생과 한 침대에서 자야 하는 날이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이기적인 의미에서 혼자만의 공간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만의 공간은 자아를 성찰하고, 삶을 설계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고집하는 것이다. 아직 독립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만약 독립해서 혼자 산다면 결혼한 뒤 상대방과 집을 합치는 것도 내겐 끔찍하게 느껴질 것 같다. 물론 상대방에게 각자의 생활공간에서 생활을 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연애한 상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도저히 설득이 되지 않는 문제이다. 나는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존에 존재하는 결혼이라는 포맷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사람들은 한 집에서 못 볼 꼴 다 보면서 사랑하는 것만이 결혼의 유일한 형태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결혼과 이혼의 개념이 없는 사회를 바란다. 있다고 해도 혼인신고나, 이혼서류 등 제도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또 그 형태가 각자의 개성마다 달랐으면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합치고, 어떤 사람들을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며, 헤어져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 각자의 방법대로 헤어지면 좋겠다. 헤어지고 싶은데 그 사이에 자녀가 생겼다면 그 문제도 역시 각자가 해결할 일이다. ✔ 배고프지 않은 예술가 : 직업 선택의 자유와 문화의 다양성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1930년대에 시행된 ‘앵떼르미땅’ 법이 있다. 이 법이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가까이서 보진 못했지만, 들은 바로는 예술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일을 하지 않을 때에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법이라고 한다. 만약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감독이나 배우뿐만이 아니라 조명 스태프, 분장 보조, 지나가는 사람3까지 모두 다 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예술직종은 다른 일과 달리 고정 업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영화 작업을 할 때에만 바쁘지 일이 없을 때에는 한가하다. 작가도, 음악가도, 화가도, 사진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직종 종사자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예술을 관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 혹은 자신의 예술 작업을 상업주의와 타협할 수 있다. 프랑스는 이러한 상황이 프랑스의 예술 다양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나는 사진을 찍거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에 재미를 느낀다. 글을 쓰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내는 사진, 영화, 글 등의 생산물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줄 것 같지는 않다. 즉, 돈을 벌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 말고 다른 일을 하는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없다. 그래서 ‘앵떼르미땅’ 법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희망을 느꼈다. 이러한 법이 예술직종 종사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직종의 종사자에게까지 적용된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사람들은 마음 놓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섹스하는 장애인 : 소수자 인권의 확립 2007년 겨울, 1호선 전철에서 어느 뇌성마비 장애인 남성이 승객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돈을 건네는 승객에게 도리어 화를 내면서 자신은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부정확한 발음에 익숙해졌고, 그는 내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던 중에 그는 휠체어를 끌고 내 자리 앞으로 와서 할 말이 있으니 잠깐 같이 내려달라고 했고, 나는 그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전철이 떠나고 승강장에 남은 그는 내게 말했다. “자매님과 자고 싶어요. 나는 야한 사람이에요.” 나는 내가 보인 지나친 친절, 그러니까 가슴이 따뜻한 체 하며 장애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실제로는 비장애인의 우월감을 드러냈던 그 오만한 행동이 장애인에게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일본의 작가 가와이 가오리가 쓴 『섹스 자원봉사』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 장애인의 성욕이 비장애인의 성욕과 비교했을 때에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충족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고, 그래서 ‘섹스 자원봉사자’가 장애인의 억눌린 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위를 돕거나 성관계의 상대가 되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섹스 자원봉사자가 장애인의 육체적 성욕은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으나 심리적 성욕, 다시 말해서 사랑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동권이야 약간의 공사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사랑권, 섹스권은 기술이 아닌 마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준에 도달한 사회라면, 장애인만이 아니라 현재 ‘소수자’라고 불리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모든 편견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 토론프로그램으로 경쟁하는 방송국들 : 언론의 정치화 나는 언론이 정치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정치화’라는 것은 특정 정치세력과 친밀해진다는 뜻이 아니고 ‘탈정치화’의 반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는 학도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언론이 탈정치화되면 시청자도 탈정치화되고, 언론이 정치화되면 시청자도 정치화된다고 말이다. 방송국이 토론프로그램을 프라임 시간대에 편성하고, 각 방송사가 얼마나 재미있는 주제로 공정하게 토론을 진행하는가로 경쟁한다면 시청자들의 정치적 지식수준과 관심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것이다. 또 올바른 토론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에서도 올바른 토론, 올바른 대화, 올바른 수다 문화가 나타날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사족을 단다. 나는 이 강의에서 소규모 공동체에 관한 학자와 활동가의 견해를 접하면서, 또 존 레논의 노래를 들으면서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존 레논이 괜히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이라고 우려한 것이 아니다. 나는 소유 개념이 없는 인간이, 그리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물리적 공간과 생산물을 공유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규모가 작은 집단에서는 그나마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의 보편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도 잘 상상할 수가 없다.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잘 상상한 것처럼 굴어볼 수도 있었겠으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소유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소유’와 ‘사유재산’이 한 학기 강의 내내 키워드와 같았는데 그 부분에 대해 끝내 상상할 수 없었다는 점이 무척 아쉽다. 이것을 앞으로 내가 해내야 할 개인적 과제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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