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법 혐의 7년 징역…20여년만에 재심서 ‘무죄’
“법치 마지막 보루역할 못해”
“법치 마지막 보루역할 못해”
애정관계로 인한 모함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으로 몰린 사업가에게 20여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법원은 원심 재판부가 의심스러운 정황을 살폈더라면 억울한 옥살이를 막을 수 있었는데도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자성의 변’을 내놨다.
198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아무개(71)씨는 한국에서 캐비닛 등을 수입해 파는 일을 했다. 김씨는 사업을 하며 알게 된 강아무개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강씨는 1989년 김씨의 부인과 내연녀에게 김씨를 간첩으로 몰아 포상금을 나눠 갖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강원도 홍천의 군부대 사진을 찍어 필름을 김씨의 가방에 넣고, 김씨 주변에 북한 관련 책자를 갖다 놓는 등 증거를 조작한 뒤 당국에 제보했다. 북한 관련 책자는 암호 책자로 둔갑했고,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암호 전문가는 김씨와 북한에 사는 그의 고모 이름이 암호에 등장한다는 엉터리 해독 결과를 내놨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김씨를 기소했고, 김씨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박형남)는 5일 김씨가 조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고 증거 등이 조작됐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원심 재판 과정에서 갈라선 김씨의 전 부인이 재심 법정에서 ‘남편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모함을 했다고 증언한 것 등이 무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당시 경찰의 사건 조작을 두고 “권한을 남용해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법치주의 이념을 훼손한 것은 그 어떤 논리로도 용납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질타했다. 검찰에 대해서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 제거’라는 명분하에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리 보장이나 적법절차를 무시할 수 있다는 인식을 여실히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또 재판부는 당시 원심의 심리와 판단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에 관해 충분한 논의나 심도 있는 심리가 이뤄진 정황은 찾아볼 수 없다”며 “형사재판의 기본 원칙을 법원이 스스로 훼손했고,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