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록어미의 금연 에세이17
사무실에서 아침 햇살을 맞는다.
이제는 몸에서 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렸으면 하는 욕심이 선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어지럼증이 핑 돈다. 역류하고, 뒤틀리고, 소용돌이치는 시간이 오늘도 이어질 모양이다. 나는 그러거니 말거니 하며 운동복을 챙겨 입고 럭비 운동장으로 나갔다. 몸이 축나서 그런지 허깨비처럼 허정거리는 걸음이다. 허긴 거울 속 개맹이 없는 남자는 요즘 환자 다름이 아니다. 담배 끊으려다 사람 하나 잡겠네 하는 푸념을 스스로 내뱉을 정도이다.
운동장을 걷다가 서서히 뛰기 시작하였다. 채 20미터도 안 뛰었는데 거칠게 숨이 차오르면서 폐가 몹시 아파 가슴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이런 폐활량으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평소에도 전철역 계단을 오르자면 통증이 느껴질 만큼 숨이 찼으나, 술과 담배 때문이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담배를 끊고 나서야 어지간히 약한 내 건강을 들여다본다. 샘을 보고 하늘을 보는 격이다. 당분간은 가벼운 조깅을 해서 폐활량부터 다스려야 할 듯하다. 어쩌자고 내 몸을 이처럼 유기하였는지, 미련하고 게으르기가 허리 꼬부라진 한 짐이다. 이제라도 금연을 해서 깨닫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건강은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거나 쉽게 회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오늘 아침 운동장에서 캑캑 솟아났다.
죽음을 묵상하면 생명이 떠오르듯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금연 이후 몰풍정(沒風情)하던 미물에서조차 생명의 경이를 느낀다. 불현듯 들어선 담배 없는 세상은 신비로웠으며, 마치 커다란 깨달음의 문 앞에선 기분이기도 하였다. 결국, 금연은 자연의 진정성을 관조해보는 기회를 주었다. 니코틴이 쌓여 발악하는 내 몸을 생각하니 생명이 참따랗게 다가왔고 생명을 묵상하니 자연, 그 가운데서도 흙이 밟히는 것이다.
아무리 도시가 깨끗하다 한들 흙이 갇힌 도시는 생명이 죽어가는 도시이다.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진다며 심각해 한다. 흙이 아닌 아스팔트 위의 세상, 수평이 아닌 수직의 세상에서는 생명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아스팔트는 생명을 잉태하는 힘을 빼앗아가지만 흙은 생명을 잉태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아스팔트가 생명의 씨를 말리면 세상은 다시 수평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흙냄새가 고소하다.’라는 말이 있다.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사람의 씨앗, 그 시원은 흙이 아니었을까. 영육이 늙으면 서서히 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하는데, 평생 쌓은 세속의 더께는 깨끗이 벗겨내야지 하는 생각이다. 썩어야 생명이다. 니코틴이나 알코올 그리고 카페인 같은 악성을 지니고서야 어찌 흙으로 돌아갈 수 있으랴. 가끔 고향을 내려가면 나는 흙을 한 움큼 쥐어 가만히 비벼보곤 한다. 한 움큼의 흙 속에서도 꿈틀거리는 생명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이다. 생명을 준 흙에서 우리는 영육간의 지혜도 얻어야 한다. 하루 한 번씩 흙을 만져 느끼고 묵상하며 그 능력 또한 닮아 가면 좋으리라. 몸을 다친 산새나 산짐승은 땅을 깊게 파서 뉘어두면 흙에서 생명의 기운을 받아 자연 치유가 될 수도 있단다. 어떤 외국인은 금연을 하고자 무인도로 떠났다지만, 나는 문득 토굴에서 한 여섯 달 정도 지내다 왔으면 싶다. 흙의 기운을 쐬면 이 지독한 설사도, 혈변도, 무기력증도 금세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금연도 무조건 극기할 게 아니라, 자연의 치유 능력 안에서 이겨내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
어제부터 계속된 혈변이 용천스럽다. 오전에는 다소 누그러진 듯해 안심이었지만 설사는 여전하다. 다만 몸의 기운은 어제보다 한결 나아 입맛이 소스라진다. 사무실 동료가 돼지볶음과 상추 그리고 된장과 풋고추 등으로 점심상을 차려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육식을 술안주로나 생각하였지 식사와 곁들인 반찬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가족끼리 고기를 구워먹어도 이를 안주 삼아 식사가 아닌 술을 마시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식사를 곁들인다고 해봐야 한두 숟갈이었나. 심지어 식당에서 삼겹살만 구워 상추쌈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낯설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술 없이도 삼겹살을 즐기는 그들이 부러워 보이기는 하였다. 오늘처럼 밥과 고기를 싼 상추쌈을 볼이 터지도록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니코틴 같은 자극적인 물질로 미각마저 잃고 살았던 모양이다. 함께 식사를 하는 동료도 게걸스럽게 상추쌈을 먹는 나를 처음 본다는 표정이다. 혈변은 밤늦도록 이어졌으나 담담히 받아들였다. 언제인가 윗집 새댁이 급히 우리 대문을 두드렸다. 자기 남편이 술이 취해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는데 옷을 벗기다 보니 온몸이 붉은 두드러기로 뒤덮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도움을 요청해왔다. 새댁을 따라 올라가 봤더니 새신랑의 상체는 두드러기로 멀쩡한 틈이 없었다. 아마 평소 술을 못하는 사람이 과음을 하여 나타난 알레르기 증상 같아서 약 사다가 먹이면 금방 가라앉을 것이라며 새댁을 안심시켰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언젠가 나도 보름 동안 술을 연이어 마셨을 때 두드러기가 일어 고생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 ‘몸에서 충돌이 일어난 모양’이라는 표현을 썼다. 혈변이 금단현상과 연관이 있나 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어느 주부가 남편이 금연 중인데 설사가 심하다며 염려하는 글이 올라와 있어 문득 그때의 새댁이 떠올랐다. 혈변이 금단현상과는 친할 수는 없더라도 갑작스런 몸의 변화가 겪는 충돌 현상이지 싶다. 특별히 내 몸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니 대범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면 금연 자체를 실패할지 모른다. 두드러기든 설사든 혈변이든 결국 내 안의 충격 때문이 아니겠는가. 훗훗한 바람과 후덥지근한 날씨가 어지간히 기승을 부린 오늘이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를 떠나, 저녁을 먹고 나니 사람이 먼저 지친다. 억지를 부려 간신히 하는 데까지 야근을 하다가 동료가 퇴근하자마자 사무실에서 잠자리를 폈다. 조금 조용하고 외롭다 싶은 밤이다 보니 슬며시 담배 생각이 난다.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미완의 원고나 멋지게 풀어냈으면 하는 마음이 욱끓는다. 거기다가 퇴근한 동료 한 사람이 자기 동네 비 소식을 전한다. 비가 몹시 내리는데 거기는 어떠냐는 것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와 그 빗소리가 연상되면서 또 사리사리 담배가 떠오른다. 망망한 푸른 바다를 건너는 나비 한 마리, 캄캄한 밤 사위에서 숨이 차다. (현재 금연 230일째)
어제부터 계속된 혈변이 용천스럽다. 오전에는 다소 누그러진 듯해 안심이었지만 설사는 여전하다. 다만 몸의 기운은 어제보다 한결 나아 입맛이 소스라진다. 사무실 동료가 돼지볶음과 상추 그리고 된장과 풋고추 등으로 점심상을 차려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육식을 술안주로나 생각하였지 식사와 곁들인 반찬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가족끼리 고기를 구워먹어도 이를 안주 삼아 식사가 아닌 술을 마시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식사를 곁들인다고 해봐야 한두 숟갈이었나. 심지어 식당에서 삼겹살만 구워 상추쌈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낯설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술 없이도 삼겹살을 즐기는 그들이 부러워 보이기는 하였다. 오늘처럼 밥과 고기를 싼 상추쌈을 볼이 터지도록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니코틴 같은 자극적인 물질로 미각마저 잃고 살았던 모양이다. 함께 식사를 하는 동료도 게걸스럽게 상추쌈을 먹는 나를 처음 본다는 표정이다. 혈변은 밤늦도록 이어졌으나 담담히 받아들였다. 언제인가 윗집 새댁이 급히 우리 대문을 두드렸다. 자기 남편이 술이 취해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는데 옷을 벗기다 보니 온몸이 붉은 두드러기로 뒤덮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도움을 요청해왔다. 새댁을 따라 올라가 봤더니 새신랑의 상체는 두드러기로 멀쩡한 틈이 없었다. 아마 평소 술을 못하는 사람이 과음을 하여 나타난 알레르기 증상 같아서 약 사다가 먹이면 금방 가라앉을 것이라며 새댁을 안심시켰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언젠가 나도 보름 동안 술을 연이어 마셨을 때 두드러기가 일어 고생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 ‘몸에서 충돌이 일어난 모양’이라는 표현을 썼다. 혈변이 금단현상과 연관이 있나 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어느 주부가 남편이 금연 중인데 설사가 심하다며 염려하는 글이 올라와 있어 문득 그때의 새댁이 떠올랐다. 혈변이 금단현상과는 친할 수는 없더라도 갑작스런 몸의 변화가 겪는 충돌 현상이지 싶다. 특별히 내 몸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니 대범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면 금연 자체를 실패할지 모른다. 두드러기든 설사든 혈변이든 결국 내 안의 충격 때문이 아니겠는가. 훗훗한 바람과 후덥지근한 날씨가 어지간히 기승을 부린 오늘이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를 떠나, 저녁을 먹고 나니 사람이 먼저 지친다. 억지를 부려 간신히 하는 데까지 야근을 하다가 동료가 퇴근하자마자 사무실에서 잠자리를 폈다. 조금 조용하고 외롭다 싶은 밤이다 보니 슬며시 담배 생각이 난다.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미완의 원고나 멋지게 풀어냈으면 하는 마음이 욱끓는다. 거기다가 퇴근한 동료 한 사람이 자기 동네 비 소식을 전한다. 비가 몹시 내리는데 거기는 어떠냐는 것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와 그 빗소리가 연상되면서 또 사리사리 담배가 떠오른다. 망망한 푸른 바다를 건너는 나비 한 마리, 캄캄한 밤 사위에서 숨이 차다. (현재 금연 230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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