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 실내에서 찍은 영친왕과 일제 관리들의 기념사진. 궁궐 기념사진은 지금은 사라진 당시 궁궐 내부 얼개와 장식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시아버지 서거에 “가장 즐거운 추억은 고종께서 오셨을때”
왕비 친필일기·엽서 등 희귀사료 706점 공개
일본에 끌려간 왕족들 ‘생활비 애원’ 편지도
왕비 친필일기·엽서 등 희귀사료 706점 공개
일본에 끌려간 왕족들 ‘생활비 애원’ 편지도
“오후 1시, … 생각하지 못한 비보가 울려 퍼졌다. 경성에 계시는 이태왕(李太王:고종) 전하께서 뇌일혈로 오전 1시35분에 발병해 오전 7시50분 중태에 빠지셨다는 보고였다. 아아, 지금까지의 기쁨은 이내 슬픔으로 변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1897~1970)의 왕비가 된 일본 메이지 일왕의 조카딸 리 마사코(한국이름 이방자:1901~1989)는 1919년 1월21일 비장한 마음으로 또박또박 일기를 썼다. 3년 전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약혼을 통보받은 그는 나흘 뒤 결혼식을 올릴 참이었지만, 시아버지( 고종)의 갑작스런 서거 탓에 식이 이듬해 4월로 미뤄졌다. 그러나 마사코는 앳된 낯의 신랑이 싫지 않았다. 그해 12월31일 일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즐거운 추억은 오직 전하께서 오셨을 때의 기억…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상이다…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었다…두번, 세번 몇 번이라도 거듭해 가야 할 즐거움이다.”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영친왕비가 1919년 1~12월 136일간 쓴 일기가 세상에 나왔다. 국립고궁박물관이 18일 공개한 영친왕가 관련 희귀 사료 706점 가운데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그의 일기다. 결혼 전후 한일 왕실 동정과 남편에 대한 감정 등이 기록된 이 일기는 그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박물관 쪽은 특강을 메모한 영친왕의 수첩과 왕족들 사이에 오고간 편지 39통, 엽서 121장, 왕가 희귀 사진 514장, 다큐 필름 등도 부분 공개했다.
이 유물들은 원래 재일교포 하정웅씨의 수집품으로 2008년 주일본 한국대사관에 기증한 것이다. 박물관 쪽이 이를 넘겨받아 그동안 번역·분석 작업을 해왔다. 일기와 함께 한글, 국한문, 일문으로 쓴 편지들도 공개됐다. 순종비 순정효황후가 안부를 물은 정갈한 글씨체의 한글 편지, 1960년대 덕혜옹주와 영친왕 입국 절차 등을 논의한 편지 등은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왕족들이 생활비·치료비 등을 대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도 보인다. 영친왕의 여동생이자 일본 귀족과 강제 결혼한 덕혜옹주가 보낸 신년 축하 엽서, 1909년 순종의 평안도 순행 사진첩과 덕수궁 석조전·정관헌 안에서 찍은 영친왕 사진, 1978년 일본에서 영친왕 내외의 삶을 소재로 만든 8㎜ 다큐 영화 <흐르는 세월>의 필름도 눈에 띄었다. 박물관 쪽은 올해 안에 도록을 낼 계획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덕수궁 함녕전에서 찍은 평민 옷차림의 고종과 영친왕의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덕혜옹주의 문안인사가 담긴 엽서.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영친왕비의 1919년 1월21일치 일기.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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