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급 전범의 유족들이 작년 11월 부천에서 모임을 가졌다.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비시급 전범 박영조의 딸 박분자씨, 네번째가 김옥동의 딸 김진형씨다. 뒷줄 가운데는 강태협의 아들이자 동진회 한국지부장 강도원(72)씨.
조선인 전범·가족 고통
‘동진회’ 일본서 보상 운동…귀국자들은 침묵 강요받아
‘친일파 후손’ 딱지에 홍역…일부는 일본 대사관서 시위
‘동진회’ 일본서 보상 운동…귀국자들은 침묵 강요받아
‘친일파 후손’ 딱지에 홍역…일부는 일본 대사관서 시위
조선인 비시(B·C)급 전범들은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일본 정부의 차별적 대우 속에서 오랜 시간 말 못할 고통을 강요당했다. 한국은 그들을 ‘친일파’라 매도했고, 일본은 “처벌을 받을 때는 일본인이었지만, 출소 뒤엔 일본인이 아니다”라며 원호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나마 ‘포로감시원’ 출신 전범 129명 가운데 일본에 남은 46명은 ‘동진회’를 중심으로 보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을 이어왔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긴 침묵을 강요당했다.
지난해 11월14일 오후 1시 경기도 부천의 한 허름한 보쌈집 지하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비시급 전범 후손들의 조촐한 모임이 열렸다.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근무하다 포로학대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옥동(1921~2006)의 외동딸 김진형(51)씨는 “아버지가 전범이었다는 얘기는 2007년께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2005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한 뒤의 일이다. “‘아버지도 신청을 해보라’고 하니까 ‘아마 힘들어서 잘 안될 것’이라며 말을 못붙이게 하더라구요. 아버지는 전범으로 처벌받았다는 사실을 평생 입밖에 내지 않았어요. 딸에게까지 말하지 못할 정도로 큰 상처였나 봐요.”
“아버지는 악독한 친일파였을까?” 20대 후반의 열혈청년이었던 정창수(47·양구군의원)씨도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긴 홍역을 앓아야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정종관(1923~84)은 새벽이면 일어나 담배를 물고 콜록콜록 기침을 쏟아내곤 했다. 오랜 수감생활 동안 몸이 상해 한쪽 폐와 갈비뼈를 모두 들어낸 정씨의 부친은 평생 노동을 하지 못했다. 갈비뼈가 없어서인지 아버지는 똑바로 서면 늘 몸이 한쪽으로 기울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아버지의 옛날 사진을 보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외국 사람들을 배경으로 이상한 군복에 별(군속의 신분을 표시하던 일종의 계급장)을 달고 있었거든요. 별이 있으니까 어린 마음에 우리 아버지는 정말 높은 사람이었나 보다 생각하곤 했죠.”
1941년 12월8일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의 불을 댕긴 일본은 곧바로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 쪽으로 전선을 넓혔다.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기록한 일본군은 1942년 한해 동안 필리핀 5만2천명, 말레이시아 9만7천명, 자바 9만3천명 등 총 26만1천여명의 연합군 포로를 손에 넣는다. 일본은 전쟁 포로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못박은 국제조약인 ‘제네바 협정’을 따르는 대신 이들을 타이·말레이시아·자바(인도네시아) 포로수용소로 분산 배치한 뒤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내몰았다. 최일선에서 포로들과 생활해야 했던 조선인 군속들에게 연합군 포로들의 분노가 집중됐다.
타이에서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 대한 병참선 확보를 위해 타이와 버마를 잇는, 길이 416.916㎞의 태면철도 가설공사를 시작했다. 1년2개월 동안 비참한 노동에 내몰린 연합군 포로 5만5천명 가운데 1만3천여명이 숨졌다. 방콕에서 서쪽으로 75㎞ 지점인 깐짜나부리 전쟁묘지에 가면 이때 숨진 연합군 포로들의 묘석이 즐비하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석유 기지였던 팔렘방을 방어하기 위한 비행장, 쿠바냐헤 군용도로, 수마트라 횡단철도 등의 공사가 이어졌고, 자바에서는 암본, 하루쿠 등의 섬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을 위한 비행장 건설이 진행됐다. 연합군의 반격으로 보급선이 끊긴 상태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중노동에 내몰린 미국·영국 국적 포로 13만2134명 가운데 3만5756명(사망률 27%)이 숨졌다. 독일·이탈리아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 4%에 견준다면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이세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은 “결국 일본의 비인도적인 포로 관리의 책임을 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분담한 셈”이라고 말했다.
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아버지의 과거를 추적하던 정창수씨는 한국으로 돌아온 포로감시원 출신들이 모여 만든 ‘토요친목회’라는 모임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친목회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 구세군회관 옆 청기와다방이 있던 퇴락한 건물 3층에 있었다.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장기와 마작으로 소일하던 공간이었다. 정씨는 그때 만난 박창원(작고) 등 노인들로부터 포로감시원에 대한 얘길 전해듣고 1990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박분자(69)씨의 아버지는 1947년 2월25일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박영조(1921~1947)다. 그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다 학도병으로 군대에 가게 되자 ‘동포에게 총을 겨눌 순 없다’며 군속을 지원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것은 박씨가 7살이던 해의 봄, 집으로 전해져 온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통해서였다. “그 이후에도 어디선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거라고 믿었죠. (한일협정 이후인) 66년에 신문에 나온 사형자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보고 하루 종일 펑펑 울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말이에요.” 양구 광주 부천/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포로감시원’ 굴곡진 삶
포로 증언만으로 전범으로 몰려…일부는 독립단 꾸려 일본군 사살
“정말, 종이 한장 차이였어요. 억울한 사람이 많았죠.”
1981년 공직에서 은퇴한 뒤 광주에서 소일하고 있는 이상문(90) 노인은 포로감시원 출신이다. 1942년 9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배치돼 근무하던 이 노인은 “나는 행정 업무를 담당해 포로들과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그 덕에 그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포로였던 연합군 병사들이 조선인 군속들의 사진을 쭉 돌려보며 ‘이놈이 나를 때렸다’, ‘이 사람이 나를 괴롭혔다’고 말하면 꼼짝없이 전범이 되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물론 포로들 입장에서는 우리들이 미웠겠죠. 실제 괴롭힌 사람도 있었을 거구요. 그렇지만 말단의 군속들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던 거죠.”
당시 포로감시 업무를 맡은 조선인 군속들은 3천여명으로, 무학에서부터 일본의 유수한 대학 졸업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이 노인 등 일부 청년들은 1944년 12월 ‘고려독립청년당’(청년당)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꾀하기도 했다.
1912년생으로 경기도 파주 출신인 이억관은 1944년 12월29일 밤 웅카랑 산록의 스모노 연병장에 모인 조선인 청년들에게 “모든 피압박 민족은 수탈자의 질곡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처칠, 루스벨트, 장개석의 카이로 선언을 소개하며 단합을 외쳤다. 즉석에서 이억관 등 조선 청년 10명은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기 위한 비밀조직인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했다. 총령은 이억관, 군사부장은 김현재, 이 노인은 스마랑 지부 책임자가 됐다.
1945년 1월4~6일 혈맹당원인 손양섭 등 3명이 자바 포로수용소 산하의 암바라와 분견소에서 일본 군인·군속 12명을 사살하고 자살하는 이른바 ‘암바라와 의거’를 일으킨 뒤, 청년당원들은 차례로 검거됐다. 이들은 7월21일 군법재판에서 7~10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들의 활동은 세인들에게 잊혔다가 1980년대 초 일본인 연구자 우쓰미 아이코(현 와세다 대학원 아태연구과 객원교수) 등에 의해 발굴돼 세상에 알려졌다.
이 노인은 1976년부터 청년당원들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해 달라며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투쟁중이다. 보훈처는 “공적을 증명할 객관적 자료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2005년 <국외독립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동남아지역> 편에서 노인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이 노인은 “이대로 나도 죽으면 먼저 간 동지들을 볼 낯이 없다”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길윤형 기자
1950년대부터 비시급 전범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 대책을 요구하며 크고 작은 집회를 열었다. 당시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집회 사진. 김석기씨 제공
박분자(69)씨의 아버지는 1947년 2월25일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박영조(1921~1947)다. 그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다 학도병으로 군대에 가게 되자 ‘동포에게 총을 겨눌 순 없다’며 군속을 지원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것은 박씨가 7살이던 해의 봄, 집으로 전해져 온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통해서였다. “그 이후에도 어디선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거라고 믿었죠. (한일협정 이후인) 66년에 신문에 나온 사형자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보고 하루 종일 펑펑 울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말이에요.” 양구 광주 부천/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이상문 노인에게 남은 소원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일이다. 그는 “그 시절 고생을 말로 다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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