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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쟁점마다 수시간…일제 ‘공출’은 ‘수탈’로 쓰기로

등록 2010-02-28 19:22

전교조 대구지부 소속 교사들(왼쪽)과 일본 히로시마현 교직원조합 소속 교사들(오른쪽)이 지난 25일 대구 수성동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열린 한·일 공동 역사교과서 집필을 위한 근·현대사 부분 토론회에서 교재 초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전교조 대구지부 소속 교사들(왼쪽)과 일본 히로시마현 교직원조합 소속 교사들(오른쪽)이 지난 25일 대구 수성동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열린 한·일 공동 역사교과서 집필을 위한 근·현대사 부분 토론회에서 교재 초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구/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3·1절 특집] 한-중-일 역사교과서 분석|한·일 교사 공동부교재 토론




고바야카와 겐 ‘히로시마현 교직원조합’ 집행위원장이 “‘공출’을 전부 ‘수탈’로 바꿔 쓰자. 일본 내에서 비판이 있더라도 각오하겠다”는 말로 2시간 가까이 끌던 ‘공출 대 수탈’ 논쟁을 정리했다.

한·일 공동 역사부교재를 집필할 때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서 군수물자를 조달해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공출’로 쓴 것을 전부 ‘수탈’로 바꿔쓰기로 했다. ‘공출’이라는 표현이 당시 조선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군수물자를 댄 것으로 왜곡할 수 있다는 지적을 일본 교사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일제강점·전후처리 역사
4박5일 12시간씩 논쟁

2월26일 대구 수성구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실. 한·일 공동 역사교과서 부교재 출판을 앞두고 전교조 대구지부와 일본 히로시마현 교직원조합 소속 교사들이 교재 초안을 놓고 팽팽한 토론을 벌였다.

2005년 펴낸 공동부교재 <조선통신사>와 견줘, 일제강점기와 전후 처리가 포함된 근현대사를 다룬 이번 책은 집필과정이 훨씬 까다로웠다. 책을 쓰기 앞서 두 나라 교사들은 ‘국가적 관점을 떠나 역사적 사실을 학생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충실히 지킨 덕분에 큰 틀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 차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교재에서 어떤 용어로 규정하고 서술할 것이냐 하는 구체적인 표현방법을 정하는 작업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12시간 넘는 마라톤 토론을 4박5일 동안 이어갔다. 한·일 공동부교재가 좀더 객관적인 언어로 다듬어지는 과정이었다.


일, 왕 전쟁책임 서술 난색

■ 일왕의 전쟁 책임 “총알을 이미 두 발 받았기 때문에 세번째는 괜찮습니다.” 고바야카와 집행위원장의 말에 팽팽한 긴장을 깨고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을 다루는 부분에서 한국 교사들이 “일왕의 책임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데 대한 답변이다. 2003년 히로시마현 교직원조합 사무실로 실탄 두 발이 발사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교직원조합은 일본 우익의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평화교육에 앞장서는 활동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의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고바야카와 집행위원장은 이 사건을 상기시키며 일본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인 일왕(천황)의 전쟁 책임을 교재에 직접 서술하기는 쉽지 않다는 대답을 대신한 것이다. 한국 교사들도 일본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직접적인 표현은 피하면서도 일왕과 재벌, 군부로 대표되는 전쟁 책임의 주체를 명확하게 짚어주자는 데 두 나라 교사들의 의견이 모였다.

‘종군위안부’→‘일본군위안부’로

■ 일본군위안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확인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위안부를 ‘성노예’로 표현하는 데는 국적을 떠나 교사들마다 의견이 갈렸다. 빈수민(32·대구고) 교사는 “성노예라고 분명히 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재홍(성광고) 교사는 “학생들에게 전달하기에 적절한 표현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일본 교사들은 “일본에서는 성노예라는 표현은 쓰지 않고, 교과서에는 ‘종군위안부’로 쓴다”고 설명했다. 격론을 벌인 끝에 개인의 의지로 군대를 따라나섰다는 의미가 담긴 ‘종군’이라는 말을 빼고, ‘일본군위안부’로 쓰기로 했다. 이 문제를 서술할 때는 “국가 책임을 추궁하는 데서 벗어나서 철저하게 여성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는 장대수(51·시지고) 교사의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일부 일본 교사들은 초고에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군인에 대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에서 황폐해져 간 군사들’이라고 쓴 부분을 그대로 두자고 주장했다. 당시 전쟁의 참상 속에 피폐해져 가는 인간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다고 본 것이다. 한국 교사들은 펄쩍 뛰었다. “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야만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이 표현은 일본 쪽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배상’이란 표기 더 논의키로

■ 국가배상 문제 일제강점기의 강제 징용, 징병, 위안부 등 피해에 대한 회복 문제로 넘어가자, 이를 ‘배상’으로 쓸 것인지 ‘보상’으로 쓸 것인지를 놓고 두 나라 교사들 간 의견이 맞섰다. 한국 교사들은 전쟁의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려면 ‘배상’이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기쿠야마 마사미치(57·미야지마공고) 교사는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라면서도 교재에 ‘배상’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 교사들은 ‘일본 사회에서 배상과 구분짓지 않고 폭넓게 보상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굳이 배상이라고 고쳐 쓸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에 반해 강태원(49·대구과학고) 교사는 “일반인들이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 보상이라고 쓰는데, 그게 바로 정부의 책임을 가리려는 의도로 ‘보상’이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일본 정부나 일부 우익언론이 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긴 토론을 거쳐 두 나라 교사들 모두 ‘배상’이라는 말을 쓰려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일본 쪽은 자국의 정서를 무시하고 배상이라는 용어를 쓰기가 어렵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은 탓인지 일부 한·일 공동 역사교재에는 일본 책에는 ‘보상’으로, 한국 책에는 ‘배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두 나라 교사들은 공동 교재의 참뜻을 살리려면 편의상 두 나라 교재에 각각 다른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고 싶어 했다. 향후 시간을 두고 다시 논의해야 하는 과제로 남겼다.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배상 문제에서는 일본 교사들이 “남한 뿐만 아니라 북한에 있는 피폭자들에 대한 배상문제까지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한국 교사들이 “우리도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일본 교사들이 먼저 언급해줘서 고맙다”고 답해 이번 교재에 북한 피폭자 배상문제도 다루기로 했다.

대구/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지배자 아닌 민중관점서 봤다”

한국쪽 장대수 교사


한국쪽 장대수 교사
한국쪽 장대수 교사
-이번 교재는 역사교과서와 어떻게 다른가?

“대체로 교과서에서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부교재에서는 지배논리가 아닌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려고 했고, 교과서에는 빠진 지역사를 보충했다.”

-한·일 공동작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뭔가?

“일본에 대해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됐고,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됐다. 여전히 남아 있는 식민사관의 영향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전쟁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짚어보면서, 끔찍한 역사 속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10년째 한-일 공동 부교재 작업을 해오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모든 토론과 집필과정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에 이뤄지다 보니, 통역과 번역을 거치면서 작업이 예상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됐다. 시간적, 경제적 제약으로 집필진이 만나서 논의할 시간이 항상 부족했다.”

-새 부교재는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나?

“사실만 전달하는 수업이 아니라 역사인식과 사고력을 높이는 수업에서 자료로 쓸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입시에만 매달려 있어 수업시간에 역사 부교재를 활용할 기회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

대구/박주희 기자


“정부차원 공동연구 빨리 되길”

일본쪽 고바야카와 교조위원장


일본쪽 고바야카와 교조위원장
일본쪽 고바야카와 교조위원장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교재에 그대로 표현하는 데는 용기가 부족하다’는 한국 교사의 지적이 있었는데?

“이 책이 일본 사회에서 폭넓게 읽힐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쓰려고 했다. 한국 교사들이 주장하는 의미를 잘 알면서도 일본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를 쓰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익이 의도적으로 쓰는 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대응을 계속할 것이다.”

-현재 일본 역사 교과서는 어떤 문제점이 있나?

“후소사나 자유사교과서 등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전쟁 가해 역사에 대해 정확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이번 부교재가 완성되면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나?

“관리·통제 교육이 강화돼 있어 교장 허락 없이 교사가 원한다고 수업시간에 전면적으로 교재로 쓰기는 어렵다. 보충 교재로 활용할 수 있다.”

-역사교육과 관련해 일본 교육당국에 바라는 점은 뭔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율교육이 보장되는 쪽으로 정책이 바뀌고 있는 데 기대를 걸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한·중·일 공동역사 연구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하루빨리 행동으로 옮겼으면 좋겠다. 이때 현장 교사들의 역할을 충분히 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대구/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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