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중 ‘3·1운동’-한 ‘난징학살’ 침묵

등록 2010-02-28 19:30

3·1운동에 참여해 종로에서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1875~1945)
3·1운동에 참여해 종로에서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1875~1945)
[3·1절 특집] 한-중-일 역사교과서 분석|근현대사 쟁점
일본침략 자국피해 초점
주변국 역사는 언급 안해




오랜 전쟁과 식민지배의 상처를 반영하듯 근·현대사로 넘어오며 한·중·일 3개국 교과서가 보여주는 인식의 격차는 넓고 깊어진다.

첫 충돌은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를 허문 ‘청일전쟁’(1894)에서 시작된다. 일본 ‘도쿄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는 “일본과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강화되는 중에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일본의 전도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청에 대항하기 위한 군비의 강화를 도모해갔다”고 전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견줘, 중국 ‘인민교육출판사’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을 침략하며 세계를 제패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을 점령했다”고 전쟁 이유를 설명했다. 양쪽 모두 ‘조선 침략 또는 지배권 유지’라는 속내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에 견줘, 한국은 ‘동학농민운동’을 설명하는 항목에서 청일전쟁을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가, 이 전쟁이 갖는 의미와 여파를 거의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일본 침략에 대한 기술을 보면, 한·중은 모두 자국의 피해와 항일운동에 초점을 둘 뿐 주변국들의 피해에는 좀처럼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다. 중국은 “(일본이) 중국 주민과 무기를 놓은 중국병사를 30만명 이상 학살”했다며 난징학살의 전말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지만 조선인이 받은 피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을 수 없다. 한국도 위안부 등 자국민의 피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난징학살 등 중국 쪽의 피해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일본이 3·1운동의 배경과 영향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중국은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난징에서 일본군은 중국 인민들을 즉결 처형했다. 중국 역사교과서는 일본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이와 비슷한 사진을 여러 장 싣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난징에서 일본군은 중국 인민들을 즉결 처형했다. 중국 역사교과서는 일본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이와 비슷한 사진을 여러 장 싣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은 자신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주변국들의 피해를 두루 서술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는 듯한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도쿄서적’의 관련 기술을 보면, “조선에서는 황민화라는 이름 아래 (중략) 창씨개명을 밀어붙였다”, “지원병 제도가 실시돼 조선의 사람들도 전쟁에 동원되었다”, “일본에서 강제노동을 한 조선인·중국인 등의 노동조건은 가혹했고, 임금도 낮고 극히 힘든 생활을 하였다”고 짧지만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전쟁으로 폭주하는 일본을 설명하는 지점에서는 “당시 내각은 만주국을 승인하는 데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1932년 5월 총리가 해군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정당정치는 막을 내렸다”는 식으로 전쟁 책임을 일부 과격파들에게 돌리고 있다. 또 대동아공영권에 대해서는 “아시아로부터 구미 세력을 몰아내고, 아시아 제민족끼리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제창했다”고 적어 비판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다.

각국의 입장 차이가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다. 패전 후 전쟁에서 한발 떨어져 있던 일본은 “(조선전쟁으로) 일본 경제가 호경기를 맞아 경제부흥이 빨라졌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견줘 참전국 가운데 하나였던 중국은 어느 쪽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했는 지는 밝히지 않은 채 “만일 우리가 출병하지 않아 적들이 압록강변까지 들어오게 나온다면, 국내·국제의 반동 기염이 더욱 사나워질 것”이라는 마오쩌둥 발언을 소개하는 등 중국군 참전의 정당성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것은 ‘전후 처리’를 다루는 한·일 양국의 시각이다. 일본은 이 문제를 “대부분의 나라가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의 나라들과의 사이에서도 배상 대신 경제협력으로 시행됐다”고 기술하며 일본의 전후처리가 정당하고 상식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문제의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만 짧게 언급하는 등 전체적으로 부실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