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봐주던 범죄피해 삼남매 후원금 등 ‘횡령’
취직 후 월급 맡겼지만 통장 잔고 고작 ’5원’
취직 후 월급 맡겼지만 통장 잔고 고작 ’5원’
한아무개(21·무직)씨는 지난 1월 서울남부지법에서 날아온 ‘아버지의 신용카드 빚 5500여만원을 변제하라’는 내용의 소장을 받아보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씨의 아버지는 44살이던 2004년 11월 살해됐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청부살해했다고 했다. 언론도 떠들썩했다. 첫째딸인 한씨는 당시 고교 1학년, 여동생과 남동생은 각각 중학생과 초등학생이었다. 삼남매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고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이듬해에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삼남매는 그 뒤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때 기억을 되살려낸 것은 6년 만에 날아든 소장이다. 한씨는 고모부 조씨(48·택시운전 기사)를 찾아갔다. 고모부는 어머니의 재판 때부터 한씨 남매를 돌봐주며 “생활비를 대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고모부는 사건 직후부터 공과금을 내주고, 삼남매의 생활비로 다달이 20만원 정도를 줬다. 학교 등록금과 교복, 급식 등은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한씨와 여동생은 성년이 돼 취직한 뒤에도 월급을 고스란히 고모부에게 맡겼다. 삼남매 명의의 통장도 모두 고모부가 관리했다. 고모부는 조카들을 위해 다달이 70만원씩 적금을 붓는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독립할 생각에 모아둔 돈을 조금 달라고 했더니 고모부가 ‘너희 어머니 빚이 수천만원이나 있어 아직 이자를 물고 있다’고 했어요.” 법원의 소장을 받아든 한씨는 아버지의 빚을 갚을 요량으로 자신의 통장 명세를 처음 뽑아봤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군대에서 허리를 다쳐 국가유공자가 된 아버지의 보훈연금으로 매달 90여만원이 꼬박꼬박 입금되고 있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 등 복지단체에서도 수십만원씩 보내왔다. 삼남매의 개인후원자도 있었다. 모두 계산해 보니 5년 동안 보훈연금 6000만원, 지원금·후원금은 5000여만원이 들어왔다. 어머니가 진 빚을 모두 갚고도 남을 돈이었다. 그러나 한씨 통장의 잔고는 단돈 5원이었다. 고모부 조씨는 자신이 갖고 있던 은행카드로 돈을 뽑아갔다. 구경도 못한 자동차세 등으로 돈이 빠져나갔다. 이런 일은 삼남매를 돕는 지원단체 등이 모두 고모부인 조씨와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씨는 “고모부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차마 아버지 보훈연금이 어떻게 됐는지 묻지도 못했다”고 했다. 한 복지단체 관계자는 “어린이 지원은 친척 등이 중간에서 지원금을 유용할 염려가 있다”며 “누구 한 사람만 자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봤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고등학생 때 척추측만증을 앓은 한씨는 고모부가 대준 생활비를 갚으려고 회사를 다니다가 증세가 나빠졌다. 한씨는 “우리 남매 앞으로 실제는 매달 200만원씩 나온 사실도 모른 채 20만원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상속포기를 하지 않아 이제는 아버지가 남긴 신용카드 빚까지 갚아야 할 처지”라며 울먹였다. 삼남매는 지난달 24일 고모부 조씨를 횡령 혐의로 서울 양천경찰서에 고소했다. 한편 고모부 조씨는 <한겨레> 기자와의 통화에서 “애들 씀씀이가 너무 헤퍼 맡겨둘 수가 없었다. 내 돈, 네 돈 구별하지 못하고 기록하지 못했을 뿐이다. 애들이 크면 주려고 4400만원을 모아놨는데 지금 그 돈을 빌려줘서 (수중에) 없다”고 말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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