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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두사람_ 이건희와 황유미

등록 2010-03-04 11:22

이 둘은 암을 앓고 있다.

그 중 한 명은 암으로 몇 해 전 죽었으나 한 명은 법정을 휠체어로 오고갈 정도의 초췌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건재하다. 이 둘은 삼성전자라는 회사에서 일했다. 한 명은 제 힘으로 들어와 노동자로 살았고 다른 한 명은 유전자로 내려와 오너로 살았다. 이 둘에겐 대체할 수 없는 가족의 죽음을 안고있다. 한 명은 딸을 잃었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을 잃고 세상이 자신을 잊는 동안에도 자신을 잊지도 잃지도 못한 아버지를 가졌다. 이 둘은 이렇듯 닮은 듯 다르고, 다른듯 닮았다. 이건희와 황유미 이야기다.

어제 프레시안에 실린 칼럼 제목 앞에서 바로 클릭을 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했다. 윤보증 씨가 쓴 "3년전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당신을 기억합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02093357§ion=02 ) 라는 글이었다. 3년 전, 그러고보니 한 아버지의 애끓는 두드림에 나 역시 함께 마음 먹먹했던 일이 있었다. 그 때 몇번인가 이 블로그에도 글을 끄적인 적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의 일이나 내가 잊혀지는 것에 지독히도 민감하면서 참 많은 것들을 빨리도 쉽게도 잊었구나 생각이 난다.

클릭해 천천히 그의 칼럼을 읽으며, 머리를 박박 깎고 환자복을 입고 앉은 앳된 여자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이 돌기보다 낯이 뜨거워진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머리카락 마저 다 빠지고도 비련해보이기 보다 금방이라도 화사하게 웃으면서 침대 위를 팔딱팔딱 뛸 것만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앳된 그녀, 스물 두 해를 겨우 살다간 삼성반도체 황유미다.

어제 내내 강박에 시달렸다. "글을 쓰고 싶어...글을 써야 해.." 글을 쓴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내 글을 애타게 기다리는 누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안쓰면 큰일은 아니어도 욕이라도 먹을 의무감도 없는데, 강박이 머리를 눌렀다.

끝내 글을 쓰지 못한 것은 속상함만은 아니었다. 바빠서만도 아니었다. 내가 한 줄 쓰면 무슨 도움이 될건데 라는 무기력함에 눌려 종일 PC 앞에만 앉으면 피곤했다. 긴 시간 까맣게 잊는 것은 쉽더니, 짧은 시간 억울하게 이승을 떠나지도 머물 수도 없는 이를 떠올리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어제, 부서 회의 때 아침마다 방송되는 그룹방송을 경청하라는 권고가 있었다. 그 탓이었을까? 통상은 대충 전날 도착한 메일들을 확인하며 대충 듣던 방송을, 보는 시늉은 못해도 듣는 시늉은 해야 할 것 같은 알량한 직장인 병이 발동했다.

30년된 전자렌지도 성의껏 고쳐준다며, 그녀가 다녔던 회사 이름이 귓전을 때려왔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문구였던 것 같다. 오래된 제품의, 오래전 잘 팔렸던 물건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어쩌구저쩌구. 내가 처한 상황이 달랐다면, 그래서 온몸으로 겪으며 지나온 것들을 몰랐더라면, 어쩌면 아침부터 잔잔히 가슴을 울려주는 감동으로만 고스란히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행간을 봐버린 탓으로 일선에서 일하는 이들의 따뜻한 가치실현이란 내용 보다 더 진하게 쓴 물이 목에서 올라왔다. 오래된, 잘 팔려주어서 회사를 먹여살려줬던 물건에도 가치를 부여하고 잊지 않는데, 어째서 그 물건을 만들었던 그 작고 연약한 손들은 잊는걸까라는.

성공TV인지 뭔지 하는 케이블방송을 틀면 열에 아홉번은 만나게 되는 이건희 회장의 아기처럼 뽀얗게 살이 오른 얼굴이, 이재용 전무의 해맑기만한 얼굴이 겹쳐 떠롤랐다. 물론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그네들을 지목할 수는 없더라도, 그렇게 존경을 갈구해 TV 방송으로 이미지 광고에 돈을 퍼부을 정도면, 원하는 존경에 걸맞는 판단이나 행동을 하면 어떨까 아쉽다면, 그건 아직도 내가 지나친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돈으로 존경을 사고 싶은 미련한 소망도, 얼마를 줘도 살려낼 수 없는 젊은 생명도.

전날의 죄책감에 아침 방송으로 더해진 아쉬움이 부어져, 오늘 나는 좀 비겁하기로 한다. 비판하고 싶은 상대가 아무리 비상식적이어도 나는 도의적으로 굴자, 되도록 현상을 볼 때 감정적으로 바라보지 말자, 나름대로 노력해왔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한다.

나는 이건희 회장에게 당신과 다른 듯 닮고 닮은 듯 다른, 당신의 신성한 제국이 신화를 일궈가는데 청춘을 쏟아부었던 한 여자아이를 기억해주면 안되겠냐고 간곡히 묻고 싶다. 그저 당신이 가진 것들을 일구는데 당신이 기억은 커녕 지각하기에도 어려운 정도의 미미함일지라도 기여했던, 아주 어린 여공에 대해 말이다. 당신이 그 즈음 잃어버린 딸과 비슷한 또래의 청춘인데 말이다. 당신이 이 사회에서 사해받은 잘못들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의 의미로라도 좋은데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비슷한 또래의 딸 아이를 가슴에 묻은 같은 아버지로써 황유미씨의 아버지를, 황유미 같이 죽거나 투병중인 당신 회사 직원들의 부모들을 한 번 생각해봐 줄 수는 없는건지 말이다. 딸의 재산을 좋은 일에 쓰이도록 사회에 헌납하는 것 이상 진심으로 당신에게 면죄부를 준 사회의 딸들을, 당신 회사의 직원들을, 품어보는 도량을 보여주는 건 안되는 걸까? 수십억의 광고비와 김용철 변호사의 책광고 보이콧 같은 뻘짓 안해도 그러면 조금쯤 '사실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 정도 저절로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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