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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블로그] 부산 여중생 성폭행살인사건_ 현실 속의「평행이론」

등록 2010-03-09 15:47

「평행이론」은 같은 운명 혹은 같은 사건, 같은 인생이 반복된다는 내용의 스릴러 물이다. 딱히 잘 만들었다고 격찬을 하기엔 허전했고, 뭔가 잘못 만들어졌다고 흠을 잡기엔 애매했다. 영화를 같이 봤던 우리 엄마의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냐"는 말씀처럼, 정말 영화같은 이야기였다. 뭐라고 평을 쓰기가 조심스럽기도 하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부러 영화평도 쓰지 않고 잊고 있었는데, 오늘 부산여중생 성폭행살인사건 보도를 접하고 생각이 났다. 현실 속의 '평행이론', 한국 사회를 한 삼십년 넘게 살고나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어떤 기시감.

포털 뉴스사이트를 들어와 관련기사들을 검색했는데, 그러잖아도 복잡한 머리가 롤러코스터 같은 타임머신을 탄다.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또 그것을 다루는 기사들도 피해자와 범행발생지역명만 바꾼듯 비슷비슷한지. 그런데 사건 자체가 주는 슬픔이나 공포와는 다른 비릿한 불쾌감이 이런 보도 기사들을 보면서 울컥 치밀어올랐다.

"전자팔찌만 있었더라면"_ 조선일보

"성폭행 관리만 잘했더라면"_ 부산일보

"끊이지 않는 아동·청소년 상대 잔혹 범죄, 이번에도 이웃이 용의자"_노컷뉴스


100% 틀리거나 생뚱맞은 관점이나 주장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기사들을 내보낸 특정 언론사들을 겨냥한 예시도 아니다. 거의 비슷비슷한 기사들 중 사건이 발생한 이유에 대한 기사들을 대표적으로 추려본 것이다. 맞다. 범인이 전자팔찌를 하고 있었다면, 성폭행 관리가 잘 됐더라면, 수상쩍은 이웃을 사전에 알아보고 경계할 수 있었더라면 끝내 중학교 교복을 입고 등교한번 해보지 못한 어린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은 아동 성범죄에 대한 재범률 관리에 있어서는 대안으로써 고민해봐야 할 테제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비극적 원인을 외면하고 있어 보인다.

이 사건이 일어난 부산시 사상구의 덕포1동은 재개발대상 지역이었다. 아이가 살던 집이나 범인이 살고있던 그 동네는 철거가 임박해 입주해있던 주민들 다수가 이사를 나간 상태였다. 일반적인 저소득층 주거지 치안 문제도 그렇겠지만, 재개발 대상이 되면서 그러잖아도 치안이 부족하고 사각지대가 많은 동네 구조에 사람들이 불규칙한 속도로 빠져나가는 지역은 적법성의 옷과 불법성의 옷을 입은 각종 폭력으로부터의 무방비도시로 전락한다. 더욱 비극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사가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들의 사정이란 것이 뻔하다는데 있다.

지난 겨울만 해도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언제 벽을 내리꽂으며 들어오는 포크레인을 맞닥드릴지 몰라 불안해하는 아현동 모자가정의 딱한 소식이 보도됐었고, 허구헌날 집을 비워내라는 철거용역직원들의 등쌀에도 나갈 곳을 찾지 못한 60대 초로의 남자가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이사비 나온다는데, 보상이 나간다는데, 이사 안가고 뭐하냐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정든 이웃들이 하나 둘 떠나며 가난해도 사람 소리로 가득했던 동네가 을씨년스러워질 때까지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열악하다. 텅 빈 동네에서 자식들 데리고 살 곳을 알아보러, 먹고 살기 위해, 집을 비웠던 아이 부모 마음에 남을 상처는, 그 가늠조차 상상의 목전에서 용기를 잃는다.

전자팔찌가 이런 환경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확률을 줄일 수 있을까? 나도 심정적으로는 아동성폭행범들에게 전자팔찌 정도가 아니라 전자 팬티를 입히든가 화학적 거세를 시키고 싶다. 성폭행 관리를 잘하면 저소득가정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이런 범죄를 직접적으로 줄일 수 있을까? 나 역시 간절히 한국이 성범죄 관리 좀 잘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전체적인 성폭행범죄율을 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소득간 격차가 있는 지역에서 균등한 혜택으로 자리잡기엔 역부족이다. 이번 사건은 일반적 환경에서 평범한 이웃에 의한 아동성폭행살인이 아니라 빈민계층주거지역의 치안부재 속에 발생한 잔혹범죄이기 때문이다.

나영이 사건이나, 예슬이 사건이나, 이번 유리 사건이 보여주는 맥락을 우리 사회가 신중하고 자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건들은 평행이론처럼 반복되지만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평행이론처럼 반복되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노력으로 줄여나갈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사회는 사건 발생과 예방 모두 평행이론 안에 갇혀있다. 저소득지역의 치안강화 문제 뿐만이 아니라, 도시 재개발이란 미명하에 원적지에 살던 이들이 주거권을 박탈당하지 않도록 현실적인 이주와 안정적 주거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정책변화, 저소득가정 아동들의 보육환경 개선과 안전한 등하교를 위한 고민 등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비극적인 평행이론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죽은 아이의 나이에 나도 재개발 물망에 오르던 지역에 살았었다. 세를 받아 사는 집주인이 나의 외할머니셨으니 힘들게 살았다고 말은 못해도 딱 재개발이 어울리는 모양새의 동네였다. 그런 시절, 집주인이나 세입자나 넉넉하지 않은 것은 피차일반이어도 그 넉넉치 않은 형편 속에서도 사람사는 것 같은 삶이 있었다. 수박 한통이 들어오면 여러 집이 나눠 먹었고, 동네 평상 위도 흥청거렸다. 그런 시절엔 화재 같은 사고나 도둑같은 잡범은 있어도 이런 흉악범죄는 많지 않았다. 가난해도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던 시대, 함께 살 부대끼며 살아가며 서로의 체온이 힘이 되던 복닥거리던 동네의 이야기다. 이제 이런 이야기들이 영화 엔딩컷의 흑백사진처럼 회상으로밖에 안되는 장면인건지 마음이 헛헛하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를 비롯한 잔혹범죄는 그 자체로 끔찍하지만, 가난이 그런 범죄로 한발 더 내몰리는 필연이 되는 사회로 가서는 안된다. 지금이, 우리 사회가 근래 겪고있는 저소득가정 아동을 대상으로 일어난 잔혹범죄를 좀더 자세히 바라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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